[역경의 열매] 여운학 (3) 하루아침에 부친 잃고, 형 있는 부산으로 피난

일하면서 대학진학 준비하던 중 졸업증 구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담임이름도 없는 엉터리서류 내

여운학 303비전성경암송학교장(뒷줄 왼쪽)이 1963년 모친, 아내, 처남, 세 자녀와 가족사진을 촬영했다.

당시 영동읍 중심가에는 서점이 한 곳 있었다. 서점 문 앞에는 서울신문 정기구독자의 이름과 함께 신문꽂이가 있었다. 신문을 개인함에 꽂아놓으면 본인이 찾아가도록 해놓은 것이다. 거기엔 중학교 1학년생인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런 것으로 자존감을 찾으려 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이를 데 없다.

중학교 3학년 때 데일 카네기의 ‘인간처세학’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송재형 교장선생님이 아침 훈화를 하시면서 인용한 중국 고전의 사자성어 ‘타산지석’ ‘전화위복’ ‘새옹지마’ 등에도 감동됐다. 그동안의 부정적 사고방식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로 확 바뀌었다.

물론 마흔이 넘은 나이에 영접한 기독교에서 깨달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는 확신의 신앙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사고방식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바뀐 것은 나의 일차적 중생 체험이라 할 수 있다.

집에서 철봉 평행봉 역도 아령 줄넘기 등의 운동을 하며 역삼각형 몸을 가꾸는 등 나름대로 행복한 학창시절을 보내던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면서 비극이 찾아왔다. 특수작물 농사에 전념하던 부친이 어느 날 아침 영문도 모른 채 동네 지서에 불려갔다. 이어 영동경찰서로 끌려간 뒤 무자비한 단체학살의 희생제물이 됐다.

하루아침에 부친을 잃은 나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1·4 후퇴 때 혼자서 무턱대고 형이 요양하던 부산으로 내려갔다. 피난민들에 휩싸여 지붕 없는 화물열차를 타고 이틀 걸려 부산에 도착했다.

전국에서 피난민들이 모여든 부산은 모든 것이 무질서와 혼란의 상태였다. 형이 창설멤버였던 사회사업기관 명덕육영회의 학생으로 합숙하면서 이런저런 배달도 하고 부두에서 점검원으로도 일했다. 때론 미군 부대 노무자로, 3등통역자로도 일하면서 대학진학을 준비했다.

고교 졸업증을 받기 위해 명덕학사 친한 동료의 알선으로 J사립고교의 늙은 교장을 찾아가서 1년분 수업료를 지급했다. 그러나 실무자인 교감에게 알리지 않고 교장이 단독으로 처리하면서 졸업자 명단에 내 이름이 오르지 못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발견하고 교장 집에 찾아가서 추궁했다. “아무 이름이나 지우고 자네 이름을 쓰게.” 그래서 엉터리 증빙서류를 갖췄다. 마감 날 부산 동대신동에 피난와 있던 서울대 사범대학 물리과에 입학원서를 냈다.

1951년 여름 불볕 아래 텐트 속에서 입학시험을 치렀다. 시험답안지 상단엔 졸업학교 담임선생님의 이름을 적어야 했다. 당황스러웠다. 모른 체하고 빈칸으로 뒀다. 마침 시험문제는 고교 1학년 수준이었기에 무난히 썼다. 그런데 일이 벌어졌다. 시험지를 간추리던 교수님이 큰 소리로 말했다. “여운학이 누구냐.” “접니다.” “담임 선생님 이름이 뭐냐.”

나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수험생들이 텐트가 떠나도록 웃었다. 교수님은 웃으며 “미친 놈” 하더니 시험지를 주섬주섬 챙겨 나갔다.

문제는 구두시험이었다. 각오는 돼 있었다. 이실직고하리라는 생각이었다. 다른 수험생들이 텐트 속으로 불려들어갔다가 금세 나왔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내 입학원서를 자세히 들여다보던 교수님이 입을 열었다. “여운학, 왜 졸업반 명단에 네 이름만 수정이 됐는가.”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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