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여운학 (4) 꿈에 부푼 대학 생활… 학비 마련하려 출판사 입사

엉터리 서류에 선처해 달라 호소… 긴 면접 끝에 합격자 명단에 올라

1955년 민교사 편집자로 근무하면서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만들 때의 여운학 장로.

나는 엉터리로 대학에 지원한 사연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저는 충북 영동농고 2학년 때 6·25사변이 터져 학교수업을 받지 못한 채 부산으로 피난 왔습니다. 대학에 진학하려는 일념으로 여러 가지 힘든 일을 하면서 번 돈으로 고등학교 졸업증을 사서 사대 물리과에 지원했습니다. 필기시험 성적을 보시고 선처해주시면 장학생으로 졸업할 각오가 돼 있습니다.”

나의 당돌한 이실직고에 황득현 물리과 주임교수는 미소로 응답했다. “자, 그러면 이걸 풀어볼까.” 미적분방정식 문제였다. 1시간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면서 문제를 풀었다.

밖에 나오자 대기 중이던 수험생들이 몰려왔다. “형씨는 왜 그렇게 면접시간이 길었소?” “나도 잘 모르겠소.” 합격자 발표날에 대여섯 명의 명덕학사 친구들을 데리고 갔다.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긴 한지에 붓으로 쓴 합격자 명단이 과별로 길게 붙어있었다. 사회과 국문과 생물과 화학과 체육과 등 모든 과는 32명의 합격자 이름이 붙어 있었다. 물리과만은 두 사람뿐이었다. 내 이름이 거기에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현직 교사였다. 황 교수는 의과대학에서 독어도 가르쳤다. 나머지 30명은 의과대학 낙방자 중 물리를 선택과목으로 택한 실력파들로 보충됐다.

1951년 9월 전쟁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웠지만 꿈에 부푼 대학생활이 시작됐다. 당시는 9월에 새 학년이 시작됐다. 부산 동대신동 운동장에 임시강의실로 세워진 천막 교실 안에서 강의가 진행됐다. 학생들은 폭이 15㎝ 정도 되는 긴 나무의자에 나란히 걸터앉아 수업을 들었다.

물리시간에 황 교수님 혼자서 칠판에 썼다 지웠다 하면서 열심히 강의했다. 수업이 어렵다 보니 뒷자리에 앉은 학생들은 딴전 피우기가 일쑤였다. 황 교수님을 돕고 싶었다. 황 교수님 댁에 놀러 갔을 때 이런 말씀을 드렸다. “교수님, 강의시간에 수업 태도가 불성실한 학생을 수시로 지목해 질문하시면 분위기가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 후 물리 시간은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

1952년 대학 2학년 초였다. 학비조달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찾고 있었다. 신문을 보다가 광고 하나가 눈에 띄었다. ‘출판사 편집사원 모집. 인원: O명, 자격요건: 대학 졸업자, 민교사(民敎社).’ 입사원서에 대학 재학생이라 쓰면 필기시험 기회조차 없을 것 같았다. 서울대 사대 2학년 중퇴라고 썼다.

민교사는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만드는 곳이었다. 그래서 시험은 국어 수학 물리 화학 생물 지리 국사 세계사 사회 일본어 영어 작문 등을 온종일 치렀다. 출판사 편집사원 지망생은 32명이었고 출신성분도 다양했다. 당시로선 보기 드물게 안정적인 일자리여서 대학 강사뿐만 아니라 서울대 사대 3~4학년 선배들도 눈에 띄었다.

며칠 후 면접통지서가 날아왔다. 입사원서에는 거짓말을 했지만, 면접 시에는 이실직고하리라는 마음의 준비가 돼 있었다. 냉정한 인상의 민교사 전무가 면접관이었다.

“전무님, 저는 서울대 물리과 2학년 재학생입니다. 면접에 불러주시면 그때 말씀드릴 각오로 이력서에는 서울대 중퇴자라고 썼습니다. 만일 저를 합격시켜 주신다면 월급은 절반만 받고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대신 매주 하루는 종일 대학강의를 듣고, 다른 날은 하루에 한 강의만 들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렇게만 해주시면 저에게 맡겨진 일은 밤을 새워서라도 감당할 자신이 있습니다.” 며칠 후 입사통지서를 받았다. 입사자는 두 사람이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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