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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여운학 (5) 산더미 같은 출판사 업무에 결국 휴학

365일 휴일 없이 일만 하다보니 대학생활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해… 유일한 야간대학 영문과로 전학

여운학 303비전성경암송학교장이 1972년 경기도 고양 백운대에서 다섯 자녀와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아직 기독교 신앙을 갖기 전이다.

민교사에서 맡은 업무는 검인정도서와 자습서를 만드는 것이었다. 중학교 1~3학년 영어자습서를 만드는 일부터 시작했다. 당시 다른 경쟁사의 영어책보다 월등히 많이 채택됐던 김선기 교수의 ‘내셔널 잉글리쉬’(National English)였다.

초교지는 복자(伏字)부터 잡아냈다. 납활자를 사용할 때라 조판소에서 미처 준비하지 못한 글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부호, 복자가 찍혀 나왔다. 이게 너무 많아서 교정지에 빨간 잉크로 표시하다 보면 종이가 온통 새빨개졌다. 이 작업을 ‘초교’라 불렀다. 지금은 컴퓨터 타이핑으로 판을 짜기 때문에 그때 교정작업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쉽고 빨라졌다. 이런 일을 저녁 10시까지 하고 퇴근했다.

원래는 오전 9시 정각부터 일을 시작해 오후 8시까지 교정을 보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러나 사장은 8시 직전에 회사에 나타나 전무 상무와 좁은 공간에 모여 있다가 밤 10시가 돼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좁은 공간에 모여 잡담하고 노는 동안에도 나는 눈이 감길 정도로 초교 재교 삼교 작업을 했다. 특히 고교 수학자습서는 깨알 같은 숫자가 많아서 교정에 땀을 뺐다. 5의 4제곱, 2와 2분의 1처럼 작은 글자를 찾아내는 게 특히 어려웠다.

그 산더미 같은 일거리를 두고 부산역 앞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동대신동 종점까지 전차로 가서 사범대학 강의까지 듣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회사는 1년 365일 휴일도 없었다. 설날도 주일도 추석도 방학도 없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또 있었다. 여러 곳에 자리한 조판소 인쇄소 제본소를 오가며 작업 진행을 관리하는 것도 내 몫이었다. 입사 전 약속했던 강의 출석은 어느새 멀어져갔다. 대학생활은 꿈도 꾸지 못했고 월급은 내가 제안한대로 여전히 반액만 받았다.

어느 날 전무가 나를 불렀다. “미스터 여, 서울이 수복됐으니 출판사를 서울로 옮기기로 했네. 예약되었으니 빌린 화물열차에 사무실 짐을 싣고 갈 수 있겠지?” 물론 그것은 나의 몫이었다. 마냥 느린 열차는 중간에 김천에서 하루를 쉬고 이틀 만에 서울에 도착했다.

사무실은 회현동 큰길가에 있었다. 나는 사무실 뒤편에 방을 잡아 사무실 지킴이 역할까지 했다. 석유곤로로 밥을 지었다. 당시엔 쌀에 돌이 많았다. 냄비에 조심스럽게 물을 넣고 잘 흔들었다. 밥이 다 지어지면 냄비 바닥에서 2~3㎝ 위까지만 밥을 걷어내 먹었다. 이렇게 하면 밑바닥에 깔린 돌을 먹지 않을 수 있었다.

반찬은 이북에서 피난을 와 사무실 입구에서 장사하던 할머니가 주셨다. “총각, 밥은 먹고 사오?” “네, 자취하고 있습니다.” “고레, 글면 내레 장사할 수 있도록 총각이 허락해 준 것에 고맙다는 뜻에서 김치를 담가 줄 테니 배춧값만 주시라우요. 김치는 내레 집에서 담아다 주겄시다.”

반찬은 고추장뿐이었다. 계란도 귀하던 시절인데 밥과 김치, 고추장을 넣고 계란을 하나 깨서 비벼 먹었다. 나중엔 일거리가 쏟아져 밥 차리는 시간을 줄이려고 남산에서 계란가루를 사와 물을 넣고 곤로에 끓여 먹였다.

동대문에 있던 서울대까지 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결국 휴학을 했다. 유일한 야간대학인 한국대학 영문학과 3학년으로 전학했다.

당시는 미국 대학 수십 곳에 편지를 써서 유학 기회를 얻어내는 게 학구열이 강한 대학생들의 유행이었다. 나도 선배들의 도움으로 장문의 영문 편지를 써서 20통을 보냈다. 어느 날 영문으로 된 편지 한 통이 왔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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