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시에 대해 강의를 하면서 수강생들이 쓴 시를 발표하게 했다. 그중 한 사람이 자신의 시를 소리 내어 읽자, 옆 사람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이제 환갑을 넘은 그 사람이 굴곡진 인생의 이야기를 시로 풀었고, 역시 그 사연을 잘 아는 친구가 울먹거린 것이다. 시를 읽는 사람도 목이 메어 잘 읽지를 못했다. 그 시가 가지고 있는 사연 때문에 두 사람이 울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별 감흥이 없었다. 그들이 살아온 사연을 잘 모르고, 발표한 시에서도 시적 서사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 너무 은유적인 시적 표현은 시적 결점이 되기도 하니까, 솔직히 말하면 며칠이 지난 뒤 그 시를 쓴 사람이 자신의 시를 다시 본다면 매우 부끄러워할 것이다. 시로서는 낙제점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 강사와 청중이 한마음이 돼 서로의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 한 편을 놓고 교감하는 매우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거라, 이걸 ‘연다’ ‘닫는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타협하는 모양을 ‘마음을 연다’라고 흔히들 표현하기도 한다.

2019년 5월 7일. 울산대교 위에서 어떤 사연이 있는 모녀가 투신을 시도했었다. 그녀들은 삶이 힘들다, 힘들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구해주기 위해 온 경찰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심지어 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때 경찰이 그녀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투신 시도자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한다. 그러자 그녀가 돌아보았고, 이야기를 나누었고, 다리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5시간 만의 극적인 구조였다.

이들의 모습을 보고 어떤 이들은 죽을 거면 곱게 죽지 쇼한다는 식의 막말을 했다고 한다. 심지어 외국에서는 어떤 소녀가 빌딩에서 투신하려고 하는데, 구경꾼들이 모여서 어서 떨어지라고 조롱을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그 장면을 즐겼다고도 한다. 사람들이 이렇다. 삶이 이렇다. 이 이야기를 저녁 식탁에서 아내에게 전해 듣고, 나는 김춘수의 꽃을 떠올렸다.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했다.

이 시를 보면 삶에 힘겨워하던 여자들의 몸짓과 경찰관이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느낌이 절묘하게 시적인 이미지와 연결된다. 결국 그녀들의 무사귀환이 시인이 같은 시에서 말한 ‘잊히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교감 순간인데, 이런 순간을 마음이 열리는 순간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비록 주위에 비아냥도 있겠다고 하지만, 그들 역시 마음을 열지 못해 타인에게 어떤 의미가 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서로에게 의미가 된다는 것은 마음이 열린다는 것이다. 마음이 열리면 봄날이 벚꽃, 목련꽃, 철쭉, 개나리가 피듯이 풍요로워진다. 우리와 밀접하게 있는 자연의 풍경이 사람 사는 모양이다.

어떤 사건이나 사고를 보는 시각은 각각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집단무의식 속에는 공감이라는 영역이 있는 것으로 안다. 이 영역이 사적, 공적으로 넓어질수록 문화국가가 되는 것이다. 삶이 힘드니 이런 공감 능력이 매우 떨어지는 사람들, 예를 들어 모녀에게 쇼를 한다는 사람의 마음이 참으로 슬프고 가여워 보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고 살고 있고, 불행한 일이지만 매우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이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현재까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힘들지만 결국 사람들이 마음을 여는 수밖에 없다. 다행스럽게 우리는 같은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연을 서로 잘 알고 있다. 작은 시 모임에서 자작시를 낭송한 수강생과 그 옆의 지인처럼, 어쩌면 이들보다 더 가까이 우리는 위치하고 있다. 다만 부르려 하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고, 보려고 하지 않으니 사달이 나는 것이다. 오늘은 누군가의 이름을 선한 마음을 가지고 조용히 불러보자.

원재훈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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