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여운학 (7) 출판시장의 큰 변화 예상하고 독립할 준비

교과서 채택 둘러싸고 잦은 비리… 문교부서 검인정교과서 바꾸자 내 이름으로 된 출판사 낼 결심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60년 서울 영등포의 교과서 인쇄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여운학 장로는 당시 민교사 출판부장으로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만들고 있었다. 국가기록원 제공

1960년대만 해도 한국출판계는 중·고등학교 검인정교과서를 발행하는 회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차츰 젊은 출판업자들이 발행하는 단행본과 각종 월간 잡지가 나오기 시작했다. 대한출판협회 회원들 가운데 세계적인 수준에 이를 정도로 창의적인 편집 인쇄 제책 기술을 갖춘 이들도 나왔다. 인쇄문화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제지기술도 선진국 수준으로 올라섰다.

민교사는 중·고등학교 검인정교과서 인가를 받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교과서 채택을 놓고 무한경쟁을 벌이다가 고리채 빚더미 위에 올라앉게 된 것이다.

당시엔 교과서를 채택하면 교사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게 관례였다. 이를테면 경기중·고나 경복중·고, 서울중·고에서 수학이나 영어교사가 은밀히 교과서 채택을 약속해주면 선불형식으로 사례하는 것이었다. 사례비는 예상되는 책값의 10분의 1이나 20분의 1 수준이었다. 서울의 명망 있는 몇몇 학교에서 검인정 교과서를 채택하면 전국 학교도 따라가는 분위기였다. 교과서를 두고 부도덕하고 치졸한 경쟁이 벌어진 것이다.

어떤 학교에선 교사들이 요령을 부렸다. 학생 500명에 해당하는 교과서 채택선수금을 여러 출판사 영업부장으로부터 미리 받았다. 그렇다 보니 같은 학년임에도 반마다 서로 다른 교과서를 사용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 결과는 뻔했다. 팔린 교과서의 몇 배를 고리채로 앞당겨 지출한 출판사들은 대부분 파산에 이르게 됐다.

출판업자들은 재빠르게 뭉쳤다. 그리고 한국검인정도서 주식회사라는 사단법인체를 만들었다. 회원사들은 거기서 미리 배당을 받는 형식으로 싼 이자의 은행 돈을 빌려 고리채 빚을 갚았다. 그러는 도중 민교사는 해체됐고 나는 그들이 설립한 회사의 편집 담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새 회사에선 전체 검인정도서를 관리하기 위해 편집부를 출판과 안에 두고 영어 수학 국어 한문 사회 지리 생물 화학 물리 체육 분야의 편집교정 멤버를 공개 모집했다. 마치 문교부 편성국 산하의 편수관실처럼 한국검인정도서 주식회사의 편집 교정실 역할을 내가 담당하게 된 것이다.

문교부는 1961년 수년에 걸친 중·고등학교 교과과정 개정 심의연구 결과를 기초로 중·고검인정교과서 개정계획을 발표했다. 새로운 출판시장이 열린다는 뜻이었다. 기회였다. ‘나도 이제는 독립할 때가 됐다. 내 이름으로 출판사를 내고 새로운 교과서를 출원해야겠다.’

내 사업을 하겠다고 생각할 때 한국검인정교과서 주식회사의 대표사장이던 홍석우 사장으로부터 은밀한 제의가 왔다.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운영하던 탐구당엔 사장실 책상이 비어있네. 자네가 그 자리로 가서 어떤 검인정교과서든지 하고 싶은 대로 제작해서 검인정 허가신청을 내게. 재정은 내가 댈 테니. 다만, 자네는 탐구당 편집회의와 저자 상담을 책임지게.”

그는 민교사 사장과 돈독한 사이였다. 그동안 나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점찍어 놓고 있었기에 이런 파격적 조건을 제시한 것이었다. 그만큼 그는 나의 교과서 제작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1963년 30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검인정교과서를 사임하고 탐구당의 부사장 직책을 맡게 됐다. 곧바로 개편될 검인정 교과서 집필 준비작업에 착수했다.

한편 나도 청하각(靑廈閣)이라는 출판사 등록을 마쳤다. 중고등용 교과서 한 권씩을 내기로 결정하고 서울사대 체육과 남정식 교수와 구두계약을 맺었다. 사대 후배로 겸손하고 지혜로웠던 그는 새 교육과정 집필요령에 맞춰 양질의 원고를 일찌감치 만들어 왔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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