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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의 소리] “들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며칠 전 동생과 함께 집 근처에 새롭게 문을 연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내 입에는 맛이 없었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식사를 마치고 나서 카페로 옮겨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는데 마침 식당 주인도 들어와 커피를 주문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무심코 그 식당의 음식 생각이 나서 “나, 그 식당에 또 가지는 않을 것 같아”라고 말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동생이 내 손을 치며 말했다. “들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바로 뒤에 식당 주인이 있다는 걸 의식하지 못한 잘못이었다. 순간, 등이 화끈거리면서 갖가지 부끄러움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들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내가 뱉은 말에 내가 얹혀서 종일 힘들었던 날, 내내 이 한 마디 문장을 생각했다. 이 말은 분명 다른 사람을 향한 비판이나 험담일 경우에 돌아오는 반응이다. 내가 비판하는 대상의 그 사람이 마침 여기 없어 다행이지 혹시 있어서 내 말을 들었다면 탈이 날 만한 일인 것이다.

문제는 지금까지 이런 말들을 꽤 주고받으며 살아온 점이다. 마침 그가 있어서 들었다면 분명 상처가 됐을 말들을, 그가 없는 곳에서 함부로 해온 셈이다. 이는 반대로 지금 내가 없는 어느 자리에서 누군가 함부로 나에 대해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하며 비판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지금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나를 업신여기는 말들이 오간다. 뭔가 좀 억울한 기분이 든다. 나라는 사람이 그가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규정되는 것도 불쾌하지만 그보다 나의 나 됨을 드러낼 수 있는 더 많은 부분이 사실은 그런 사람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를 말할 수 있는 내가 정작 그 자리에 없다.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한다. 이 지점을 생각해보면 그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 그에 대해 이런저런 평가의 잣대로 함부로 말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비판의 말을 해야 한다면 적어도 그 당사자 앞에서 해야만, 그로 하여금 그 일에 대해 자신을 해명하거나 변호할 기회를 줄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업신여기다’는 단어를 풀면서, ‘없이+여기다’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겠냐고 추측했다. 정확한 어원은 모르겠지만 두고두고 생각해봄 직한 설명이었다. 실제로 그가 여기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를 업신여기는 말을 함부로 하게 된다.

구약성경에서도 하나님께 죄를 범한 대부분이 지금 여기에 하나님이 없다고 여겨서 자기 마음대로 행한 경우들이다.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통해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은 것이 바로 하나님을 업신여긴 죄라고 지적하셨다.(삼하 12:10)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지금 여기서 다 보고 계신데도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 죄를 책망한 것이다.

독일의 시인 프리드리히 휠덜린은 “그리하여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도/ 위험한 존재인 언어가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시를 썼는데, 어쩌면 그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 또한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도 위험한 존재이지 않을까. 그러므로 매 순간 어떤 언어를 발산할 때 내 숨어 있는 뛰어남이 나타날 수도 있고 반대로 내 위험함이 나타날 수도 있음을 긴장하며 배운다. 그가 들으면 안 될 내용이라면 그가 없는 자리에서 말하면 안 된다. 그가 지금은 여기 없지만, 저기에는 분명 제 모습으로 존재하기에 여기에도 있는 것처럼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해야겠다.

“그가 들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앞으로도 오래도록 이 문장을 생각해야겠다. 내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는 여기에 와 있다. 그의 존재는 자기 이름이 호명된 바로 그 자리에 충만하다. 그러므로 그의 이름에, 그의 존재에 어울리는 말을 해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나를 향한 말이 오갈 때 멀리 있는 내 존재가 평화를 누리고 싶은 것처럼 그 역시 내가 하는 말에 평화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멀리서 무슨 말을 듣더라도 나라는 존재를 생각하면 괜히 마음이 놓이는, 그런 관계를 그리며 오늘도 내 말들을 돌아본다.

김주련 대표(성서유니온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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