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여운학 (11) 새신자들, 하나님 말씀 큰소리 암송하며 기뻐해

사업의 흥망 하나님께 맡기고 정직한 기독교 전문출판사 열어

여운학 303비전성경암송학교장이 1978년 창립한 규장출판사 전경. 1996년 1월 서울 서초구 현재의 선교센터로 옮겼다.

교회에 나가자마자 많은 신기록을 세웠다. 늦깎이 새신자가 새벽예배에 개근했고 주일성수를 한 것은 물론 부사장이라는 바쁜 업무에 쫓기면서도 수요일 밤예배, 금요일 철야예배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등록 2년 만에 안수집사 투표에서 몰표를 받았고 이듬해엔 장로로 뽑혔다. 새신자부장을 맡으면서 교회 부목사님이 가르치는 새신자 교육이 마음에 걸렸다. “주님, 가능하면 제가 새신자교육을 맡게 해주십시오. 새신자의 눈높이에 맞게 섬기겠습니다.”

신실하신 주께서 역사하셨다. 담임목사님이 안식년을 맞아 유럽과 미국에 다녀오는 동안 부목사님은 주일설교를 하시고 새신자부 설교는 부장인 내가 맡게 됐다.

나는 기도 응답이라 믿고 감사하면서 3개월 동안 새로운 교육방법을 도입했다. 딱딱하던 새신자반 분위기가 기쁨으로 확 바뀌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가르치는 교육 대신 성경 말씀을 조금씩 암송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첫날은 요한복음 15장 1절을 다 함께 암송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새신자반은 일흔이 넘은 할머니 두 분, 할아버지 한 분에 젊은 남자 대학생과 젊은 부인 등 모두 7~8명이었다. 교사는 권사님, 남녀 집사님 등 5명이었다. 새신자와 교사가 서로 섞여 얼굴을 마주 보며 빙 둘러앉았다. 원래는 의자가 없는 비닐장판방이었다.

다 같이 이 말씀을 10번, 20번 반복하며 암송했다. 처음에는 완행으로 천천히 암송하다가 점차 급행으로 빨리 큰소리로 암송했다.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입으로 암송하면서 큰 기쁨을 맛보게 됐다. 나는 대학생 새신자에게 영어로 따라 하면 더 좋다고 했다. 그러자 눈빛이 살아났다. “아이 앰 더 트루 바인 앤드 마이 파더 이즈 더 가드너(I am the true vine and my Father is the gardener).”

그 자리에 앉아있던 모두가 힘차게 따라 했다. 한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나는 말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입으로 큰 소리로 암송하니 어떤 마음이 듭니까.” “네, 아주 좋습니다.” 모두가 밝은 미소로 대답했다. 그때의 분위기는 마치 오순절 다락방 같았다.

교회 장로가 되고 보니 세무장부를 2중으로 해야만 하는 탐구당 부사장 자리가 날로 부담스러워졌다. 특별한 부정을 저지른 것도 없는데 세무조사 나온다는 소문이 돌면 모든 장부를 감췄다. 어떤 때는 소문만 나고 실제로 사찰을 오지 않을 때도 있었고 열흘 정도 늦게 오기도 했다.

그럴 경우 일체의 업무가 중지됐다. 나는 경리에는 전혀 관계하지 않고 책 출판의 실무만 담당했지만 여러 걱정이 앞섰다. ‘만일 세무사찰에 걸려 내 이름이 신문에 나오면 어떻게 될까.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죄송할 텐데 사회생활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건 정말 아닌 것 같다.’

1978년 드디어 기독교 전문출판사를 차리기로 결심했다. 사업의 흥망은 하나님께 맡기고 정직한 출판을 하기로 다짐했다. 규장각에 있는 한국사 한문 사료들을 국사편찬위원회와 의논해 번각 발행 또는 번역판으로 출판하는 것이 나의 사명임도 다짐했다.

회사의 이름이 나의 꿈과 일치해야 했기에 여러 친한 학자 교수들과 의논한 끝에 규장문화사(奎章文化社)로 정했다. 규장은 한국문화의 르네상스를 일으킨 정조대왕의 아호다. 규장문화사는 그 이름만으로도 문화창달의 사명을 띤 출판사라는 긍지를 갖게 됐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