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천만세운동 참여 이끌고 상해 임시정부 후원 모금 앞장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2부> 독립운동과 한국교회 (16) 제주도에서 활약한 주역들


제주도민들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6일 김장환이 숙부인 김시범을 만나면서 시작됐다. 휘문고보 4학년이던 김장환은 경성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에 참여한 뒤 일경의 감시를 뚫고 고향인 제주 조천리에 도착했다. 그의 품엔 독립선언서가 있었다. 경성의 상황을 전해 들은 김시범은 이곳 유지들과 접촉해 만세운동을 제안했다.

거사일은 제주도 유림을 이끌던 김시우 선생의 기일인 3월 21일로 정했다. 주동자들은 직접 태극기를 만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제주 만세운동은 일경의 폭력적인 진압에도 24일까지 네 차례 이어졌다. 당시 조천읍 조천리 미밋동산에서 신촌리까지 2㎞ 거리엔 나흘 동안 도민들의 함성이 가득했다.

100년 전 만세 물결이 이어졌던 미밋동산을 지난 14일 찾았다. 이곳엔 조천만세동산이 조성돼 있다. 제주 독립운동의 성지인 셈이다. 동산엔 제주항일기념관과 애국선열추모탑, 3·1독립운동기념탑이 있다.

향토사학자인 김인주 제주 봉성교회 목사는 “조천은 제주 항일운동의 구심점이었다”면서 “만세운동에 참여한 이들 대부분이 일경에 체포됐지만, 조천만세운동은 제주도민들의 저항이 시작된 출발점이지 종착점은 아니었다”고 했다. 그는 “곧이어 전개된 상해임시정부 지원금 모금에도 기독교인들이 앞장섰다”고 설명했다.

김인주 제주 봉성교회 목사가 14일 제주 조천읍 제주항일기념관에 있는 김연배 집사의 묘비 앞에서 1919년 3월 21일부터 나흘 동안 진행됐던 조천만세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조천만세운동엔 김연배 조천교회 집사의 활약도 컸다. 김 목사는 “24세의 나이로 조천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고 조천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김 집사는 제주 곳곳의 교회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면서 “3월 24일 검거돼 8개월형을 선고받았다”고 했다. 당시 함께 재판을 받은 제주도민이 14명이었는데 이들은 ‘동미회’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았다. ‘미밋동산의 동지’라는 뜻이다.

3·1운동은 제주도민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운 계기가 됐다.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이들 중 상당수가 일경의 눈을 피해 중국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임시정부 후원을 위한 모금이 전국적으로 시작되자 제주에서는 조봉호 조사(助事)가 나섰다. 당시 조사는 목사를 도와 사역하던 직분으로 지금의 전도사와 비슷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경신학교에 다니다 1904년 고향인 제주로 돌아온 조봉호는 1908년 이기풍 목사가 제주에서 선교를 시작하자 그의 조사로 활동했다. 신앙은 그를 독립운동의 길로 이끌었다. 1919년 4월 11일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됐다. 그해 5월 제주에 임시정부 후원을 위한 ‘조선독립희생회’가 조직됐다. 희생회는 1인당 2원의 임시정부 후원금을 낼 것을 요청했는데 조 조사가 모금에 앞장섰다. 그는 제주의 교회를 돌며 후원을 요청했다. 교회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모금을 시작한 지 50일 만에 4450명의 도민이 성금을 냈다. 이렇게 모아진 기금은 1만원에 달했다. 희생회는 이를 상해임시정부로 보냈다.

김 목사는 “당시 1만원이면 현재 화폐가치로 20억원에 달하는 거금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조봉호 본인이 개인재산을 털어 후원금에 보탰다”면서 “80필지에 이르는 밭과 집을 모두 처분해 상해임시정부로 보냈고 이로 인해 가세가 기울었다”고 밝혔다. 김 목사는 “1만원 중 상당액이 조봉호 개인이 낸 돈이었을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희생회 회원 일부는 임시정부에 참여하기 위해 상하이로 떠나려다 일경에 체포됐다. 수사 중 임시정부로 거액을 송금한 영수증도 발각됐다. 조봉호를 비롯한 관계자 60여명이 검거됐다.

김 목사는 “조봉호는 일경에게 ‘모두 내가 한 일’이라며 동료들을 보호했다”면서 “기소됐던 27명 중 조봉호와 최정식만 실형을 살았다”고 밝혔다. 조봉호의 삶은 길지 않았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그는 이듬해인 1920년 4월 28일 고문후유증으로 눈을 감았다. 정부는 63년 대통령 표창, 77년 건국포장, 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제주 사라봉길 모충사에 있는 조봉호 조사의 순국기념비 모습.

제주도민들은 76년 1월 11일 17만여명의 성금을 모아 제주 건입동 사라봉 기슭에 모충사를 세웠다. 오래전부터 낙조가 유명해 ‘사봉낙조(紗峯落照)’로 불린 곳이다. 절경을 자랑하는 이곳에 제주의 영웅을 기리는 20m 높이의 탑이 서 있다. 의병항쟁기념탑을 중심으로 오른쪽엔 제주의 어머니로 불리는 김만덕기념탑, 왼쪽엔 조봉호기념탑이 있다. 세 개의 탑이 마치 제주도를 내려다보며 품고 있는 듯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제주노회는 조봉호의 업적을 인정해 그를 표창해 달라고 총회에 요청한 상태다. 조봉호와 그가 주도한 임시정부 후원금 모금이 독립을 향한 제주도민들의 열망을 표출한 대표적 사건이었다는 이유에서다.

김 목사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제주도는 독립의 열기를 키우고 이를 다시 육지로 보냈던 희망의 공간이었다”면서 “독립운동사에서 더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제주=글·사진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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