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전시 내각을 이끌던 윈스턴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10월 런던 북부의 사립명문 해로스쿨 연단에 섰다. 48년 후배인 모교 졸업생들을 향해 그는 한 문단에 ‘never’를 여덟 차례나 반복하는 강력한 연설을 했다.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결코 포기 마십시오. 위대하든 왜소하든,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결코 마십시오. 결코, 결코, 결코 아무것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다만 명예와 양식(良識)에 대한 확신에 양보하십시오. 결코 폭력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적의 힘이 명백히 압도적이더라도 결코 굴복하지 마십시오.”

해로스쿨 연설은 졸업식 축사 가운데 명연설로 꼽힌다. 처칠은 유럽 전역을 순식간에 휩쓴 막강한 독일에 끈질기게 저항해 연합군 승전의 불씨를 살린 인물이다. 연설에는 나치 공군기의 파상적인 런던 폭격 속에서도 V자를 그려 보이던 용기와 불굴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서구의 졸업식에서는 저명인사를 초청해 연설을 듣는 일이 미덕으로 돼 있다. 의례적인 학교 기관장 축사와 긴 포상 행렬, 송사와 답사가 이어지는 우리와 다르다. 졸업생들이 귀담아들을 만하다면 굳이 출신학교를 따지지 않는다. 하버드나 스탠퍼드 같은 명문대의 연사로 누가 등단할지는 졸업 시즌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된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의 2005년 6월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사도 명연설이었다. 그는 리드대에 입학했으나 6개월 만에 중퇴했고 대학졸업식 참석은 처음이었다. 1년 전 췌장암 진단을 받았던 그는 인생 각 점들의 연결, 사랑과 상실, 죽음의 세 주제로 나눠 자신의 삶을 얘기했다. 그는 33년 동안 매일 아침 거울을 보고 스스로에게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 날이라면 이 일을 할 것인가’라고 묻곤 했다고 말했다. 이어 “곧 죽음을 맞이하리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중대 결정을 내릴 때 의지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라면서 죽음을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불렀다.

지난 주말 미 애틀랜타 모어하우스칼리지에서 열린 졸업식 연설이 화제가 되고 있다. 사모펀드 경영자인 로버트 F 스미스가 올해 졸업생 전원의 학자금 대출금을 모두 갚아주겠다고 약속했다. 할리우드영화 ‘캡틴아메리카-시빌워’에서 토니 스타크가 모교인 MIT에 갔다가 학생들의 모든 연구를 공짜로 지원하겠다고 깜짝 발표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외신들은 이번 기부액을 4000만 달러로 추정했다. 그의 선물은 비싼 학비 때문에 수만 달러에 이르는 빚을 지고 사회에 나서야 하는 졸업생들에게는 더없이 기쁜 소식일 것이다.

하지만 연설에서 더 눈길을 끈 것은 헌신의 미덕을 강조한 대목이다. “졸업장은 엘리트 증명서입니다. 그러나 그저 지금껏 성취한 것들을 반영하는, 벽에 걸어둘 문서라고 생각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졸업장은 여러분을 떠받쳤던 전설들의 영예를 드높이기 위해 여러분의 재능과 에너지를 쓰기를 요구하는 계약, 사회적 계약서입니다.” 그는 선물을 받은 학생들이 자신들보다 못한 사람들을 능력이 닿는 대로 보살피겠다는 데 생각이 미치기를 원한다고 기부 배경을 밝히기도 했다.

돈보다 더 귀한 것은 이런 헌신에의 의무의식이다. 그리고 의무감에 대한 공감의 확산이다. 한 흑인 억만장자가 마틴 루서 킹 목사 등을 배출한 흑인 학교 졸업식에서 강조한 헌신의 각오가 불꽃을 일으켜 다른 학교로, 지역사회와 국가를 넘어 인류 전체로 번져 나간다면 그 가치는 비단 4000만 달러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천편일률적인 졸업식 풍경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나오고 있다. 지난 2월 서울대 졸업식에는 방탄소년단의 소속기획사인 빅히트엔터테인먼트의 방시혁 대표가 연사로 초청됐다. 그는 자신의 삶을 이끌어온 것은 확고히 정립된 목표가 아니라 음악 산업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 이를 넘어서려는 노력이었다고 소개했다. 이어 스스로의 행복을 좇는 것이 세상의 행복을 증대시키는 일이 될 것이며, 이것은 졸업생에게 주어진 의무이기도 하다고 주문했다. 지난해에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고려대 졸업식 연단에 서서 사회적 가치를 강조하는 격려사를 하기도 했다.

내년도 우리 각 학교 졸업식도 참신한 형식과 훌륭한 축사들로 채워지기 바란다. 견인불발의 항전 의지든, 죽음 앞 진지한 삶의 태도든 혹은 통 큰 깜짝 기부도 좋다. 취업난에 피폐해진 졸업생들을 어루만져 헌신의 용기를 되찾게 하고 사회에도 큰 공감을 불러일으킬 ‘일생의 축사’가 쏟아지길 고대한다.

김의구 제작국장 겸 논설위원 eg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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