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제조업체에 근무하는 여성 근로자의 혈액암 발병 위험이 다른 근로자보다 1.55~1.92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18년간 약 20만명에 달하는 반도체 제조업 근로자들을 추적 조사한 정부의 공식 발표 내용이다. 그동안 반도체 작업환경과 암 발병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는 업계 주장을 반박하는 결과다. 정부는 이 조사를 향후 반도체 암 발생 예방정책 수립과 산재처리 과정 등에 활용할 예정이다.

안전보건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하 연구원)은 22일 ‘반도체 제조업 근로자 역학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6개사의 9개 반도체 사업장 전·현직 근로자 20여만명을 대상으로 1998년부터 2015년까지 암 발생과 그로 인한 사망을 추적 조사했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 고재철 원장이 22일 정부세종청사에서 반도체 제조업 근로자 역학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분석 결과 반도체 제조업체에 근무하는 여성의 혈액암 발생 비율이 일반 근로자와 비교해 높은 것으로 확인했다. 백혈병의 경우 전체 근로자 대비 1.55배 발생할 위험이 컸다. 백혈병으로 인한 사망 위험은 2.30배에 달했다. 특히 생산라인인 ‘클린룸’에서 근무하는 여성 오퍼레이터(반도체 패키징 및 제품 생산, 검수 등 업무)가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 기간 동안 백혈병에 걸린 반도체 여성 근로자는 32명(사망자 23명)인데, 이 가운데 22명(사망자 19명)이 여성 오퍼레이터였다. 또 다른 혈액암인 비호지킨림프종도 마찬가지였다. 반도체 제조업 여성 근로자의 발생 위험비는 전체 근로자 대비 1.92배 높았고, 사망 위험은 3.68배까지 치솟았다.

이는 연구원이 2008년에 발표한 조사 결과를 뒤집는 내용이다. 앞서 연구원은 반도체 제조업체에서 근무하는 근로자의 백혈병 발생률이 일반 국민보다 높긴 하지만 통계적으로 유의한 수준이 아니라고 밝혔었다. 당시 짧은 추적 기간 등 역학조사의 한계성을 두고 논란이 제기되기도 했다.


연구원은 혈액암 발생 위험도가 높은 원인이 반도체 제조업의 작업환경에 있을 것으로 봤다. 김은아 직업건강연구 실장은 “클린룸에서 근무하는 오퍼레이터나 엔지니어 등에서 혈액암 발생비가 높은 경향을 보였고, 최근보다 유해물질 노출 수준이 높았던 2010년 이전 여성 입사자에게서 위험비가 더 높았다. 이런 점을 보면 작업환경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유독 여성 근로자에게 혈액암 발생위험이 더 큰 점이나 혈액암 외 다른 암 발생 위험도 역시 큰 점에 대해선 확실한 답을 내놓진 못했다. 김 실장은 “반도체 작업장 내 남성 근로자 수가 워낙 적고, 혈액암 외 다른 암의 경우 일반 국민에 비해 상대적으로 암 검진을 받을 기회가 많아서 나타난 현상일 수 있다.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번 조사대상에서 빠진 하청업체 작업장에 대해서도 추가 조사가 이뤄져야 할 것으로 봤다.

정부는 조사 결과를 향후 정책에 참고할 예정이다. 박두용 안전보건공단 이사장은 “이번 조사가 국내 반도체 제조업의 암 발생 위험을 관리하고 능동적 예방정책을 수립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암 발생에 따른 산재처리에도 활용될 전망이다. 정부는 이미 2017년 9월부터 작업 기간과 노출량 등 기준만 충족할 경우 사용자 측의 반증이 없는 한 업무상 질병으로 승인하는 추정의 원칙을 도입해 시행하고 있다. 이어 지난해 8월부터는 반도체·디스플레이 업종 근로자의 직업성 암 산재 신청 시 암 종류에 따라 역학조사를 생략하도록 하고 있다.

세종=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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