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여운학 (13) 기독교 출판계의 샛별… 경제적 어려움에 고통

책 매진되자 광고요청, 모두 들어줘… 종이값·신문광고료 감당할 길 없어

303비전성경암송학교장인 여운학 장로가 1978년 규장문화사를 설립한 뒤 출간한 도서들. 여 장로는 ‘이것이 가나안이다’ ‘죽으면 죽으리라’ 등 양서를 다수 발간했다.

나는 일찍이 가나안농군학교 설립자인 일가 김용기 장로님의 저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을 읽고 은혜를 많이 받았다. 다만, 본인이 기술한 것도 좋았지만 제3자가 객관적 안목으로 가나안농군학교의 설립과정과 그동안 이룩한 공적을 밝힌 책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제1가나안농군학교 교장과 제2가나안농군학교 교장에게 각각 편지를 써서 보냈다. 어느 날 제2가나안농군학교에서 전화가 사무실로 걸려왔다. 당장 강원도 신림에 자리한 그곳을 찾아갔다. 거기서 김 장로님의 둘째 아들 김범일 교장과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끝에 ‘이것이 가나안이다’라는 책을 출판하기로 합의를 봤다.

우선 경건한 기독교 작가를 찾는 게 관건이었다. 마침내 친지의 소개로 크리스천 작가인 박완씨를 만났다. 그는 일반 기업의 간부들과 함께 1주일간 제2가나안농군학교 합숙훈련을 받았다.

“1년간의 여유를 갖고 ‘이것이 가나안이다’를 써 주시면 됩니다.” 뜻밖에 그는 3개월 만에 완성된 원고를 보내왔다. 조판 인쇄 제본에는 1개월도 채 걸리지 않았다. 유명 일간지에 작은 광고를 냈다.

일주일도 지나기 전에 5000부 초판본이 매진됐다. 재판 3판 나오기가 바쁘게 계속 매진됐다. 그러자 여러 일간지 광고부장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나는 탐구당에서처럼 너그럽게 그들의 광고요청을 다 들어줬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서점에서는 4~5개월 연수표로 결제해 주는데 종잇값은 현금으로 결제해야만 했다. 게다가 거저 내줄 듯이 인심 쓰던 신문광고의 청구서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단행본 한 권이 아무리 많이 팔린다 해도 종잇값과 신문광고료를 감당할 정도는 되지 않았다.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장사를 한 셈이다.

당시 규장문화사는 부진했던 기독교출판계의 샛별로 화제가 되었다. 연이어 장기려 박사의 저서 ‘생명과 사랑’ ‘평화와 사랑’을 펴냈다.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에 대한 세계 명사들의 글모음과 교회구역조직에 관한 조 목사의 특강 등을 모아 ‘죽으면 죽으리라’를 출간했다. 김준곤 목사의 ‘예수 칼럼’(출판대행), 한경직 목사의 전기 ‘한경직 목사’ ‘한경직 칼럼’, 송명희 시집 시리즈, 신상헌 글모음 시리즈 등 신앙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베스트셀러도 꾸준히 발행했다.

그때는 겁도 없이 비싼 고리채를 쓰기 시작했던 시기다. 고리채는 산더미처럼 늘어갔고 경제적 어려움이 닥쳐왔다. 외화내빈(外華內貧), 고통의 삶은 지속됐다.

돌이켜 생각하면 규장문화사의 문을 열고 전반 10년 동안 일어났던 희비애락의 추억들이 산더미 같다. 그중 몇 가지만 뽑는다면 출판을 하면서 가까이 알게 되고 인생을 배우게 된 세 분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는 김 장로님이다. 그분을 통해 믿음과 실천적 삶을 배울 수 있었다. 장로님은 문서로 약속의 보증을 삼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가나안농군학교의 이름으로 20권의 책을 출판하면서 문서로 된 계약서는 하나도 없었다. 한번 믿고 약속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으로 그 자체가 불변의 보증이었다.

김 장로님이 세웠던 이상촌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이루지 못한 이상촌이었다. 그분의 ‘이동식 가나안농군학교’가 모티브가 돼 훗날 ‘이동식 이슬비 전도학교’와 ‘이동식 성경암송학교’를 만들었다. 그분이 모토로 삼은 성경말씀은 마태복음 6장 33절이다. 나의 모토 말씀은 ‘롬팔이팔’(롬 8:28)이었다. 그다음은 장기려 박사였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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