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여운학 (14) ‘주 안에서 즐겨 바보 되고, 주 위해서 기뻐 손해 보라’

장기려 박사 ‘나의 이력서’에 감동 주변 도움 받아 엮음 형식으로 출판… 묵필 선물이 내 평생의 좌우명

규장문화사 대표였던 여운학 장로가(왼쪽) 1980년 강원도 원주 신림가나안농군학교에서 고 김용기 장로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1979년 장기려 박사님을 만난 것은 한 일간신문의 ‘나의 이력서’ 코너에서 박사님의 칼럼을 읽고 크게 감동을 받은 게 계기가 됐다. 이 코너에 실린 칼럼을 읽을 때면 주인공들이 자신의 감춰진 부분을 드러내고 보여주려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장 박사님의 ‘나의 이력서’는 달랐다. 본인이 애써 감췄던 선행을 신문사 측에서 보충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분의 책을 내겠다는 집념은 거기서 비롯됐다.

당장 부산 청십자병원 원장실로 찾아갔다. 온화한 인상의 그는 초면의 나를 따뜻하게 맞아줬다. 김용기 장로님의 신간 ‘이것이 가나안이다’를 드리면서 규장문화사의 일곱 가지 수칙을 소개했다. 신문에서 박사님의 칼럼을 읽었는데 여기에 박사님의 글을 더해 출판하면 젊은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줄 믿는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는 정중하게 나의 말을 다 들어줬다. 그리고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나의 이력서는 내가 쓴 것이 아니고 자기들이 쓴 것입니다. 내가 써놓은 글도 없소이다.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그의 말은 단호했다. 나는 조용히 물러 나와 비서역을 맡고 있던 분과 의논했다. 장 박사님의 애제자이자 며느리인 서울 명륜동 안과의원 원장을 통해 출판의 뜻을 이루기로 하고 돌아왔다. 결국 주변의 많은 분들이 도움을 줘 어렵게 여운학 엮음이라는 형태로 ‘생명과 사랑’ ‘평화와 사랑’ ‘장기려 박사’ 세 권을 출판했다.

그 후 장 박사님의 거처에 그의 제자들과 함께 초청받았다. 그리고 내 평생 좌우명으로 삼은 ‘주 안에서 바보 되고 주 위해서 손해 보라’는 묵필 선물을 그 자리에서 받았다. 1984년 나의 다섯 아들에게도 나의 묵필로 이 좌우명을 써줬다. 지금도 다섯 아들은 이 묵필을 값진 액자에 넣어 가정마다 거실 벽에 걸어놨다.

이 좌우명은 규장문화사와 이슬비장학회의 모토가 됐다. 다만 억지로 바보 되고 눈물 머금고 손해 보기 쉽다 하여 2000년부터는 문구를 보충해 ‘주 안에서 즐겨 바보 되고 주 위해서 기뻐 손해 보라’로 개정했다.

장 박사님에 관한 여러 일화 중 잊히지 않는 게 두 가지가 있다. 부산 피난시절에 그는 부산복음병원을 세웠고 의료보험이라는 실험적 시도를 청십자병원을 통해 추진했다. 당시 가난한 피난민들과 부산지역 빈민층에게 값싼 의료 서비스로 소문이 나자 환자가 너무 많이 모여드는 바람에 처방약이 떨어졌다. 이때 부산항에 정박해 있던 스웨덴병원선 선장의 호의로 종합비타민 알약을 포대로 선물 받았다. 환자들에게 그 종합비타민 알약을 줬더니 모든 병이 씻은 듯이 나아서 만병통치약으로 불렸다는 말을 들었다.

다른 하나는 부산에서 천막을 치고 환자들을 치료할 때 이야기다. 장 박사님은 외과 전문으로 나무병상에서 온종일 외과수술을 했고 경성의전 후배이자 동료인 전종휘 박사는 내과를 담당했다. 장 박사님은 가족이 아들 하나뿐이었는데 전 박사는 가족이 여럿이었고 구급차 운전사도 가족이 하나였다. 그들 셋은 각자 가족 수대로 월급을 가져갔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1982년 한경직 목사님의 전기를 냈다. K목사라는 분이 원고를 다 썼고 한 목사님의 출판 허락까지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원고를 보니 아주 부실했다. 어떻게 그런 원고로 한 목사님의 출판 허락을 받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1980년 한 목사님이 머물고 계시던 남한산성으로 찾아갔다. 김 장로님과 장 박사님의 책을 증정하며 이처럼 내가 원고를 다시 써서 출판하겠다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한 목사님은 흔쾌히 허락하셨다. 나는 온 정성을 다해 처음부터 쓰기 시작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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