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란 일단 중지했다가도 하루아침에 부활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문학이건 예술이건 전쟁의 도구가 되지 않으면 아낌없이 박멸해야 합니다.” 이태준의 소설 ‘해방전후’에 묘사된 서울 문인궐기대회에서 일제 총독부 관리가 한 말이다. ‘해방전후’는 이태준이 겪은 그 시대 사회상을 그린 자전적 소설이다. 그는 작품을 통해 ‘파쇼국가의 문화 행정의 야만성’을 그대로 보여줬다. ‘해방전후’ 주인공 작가 현은 문인궐기대회 단상에 올라 유창한 일본말로 저속한 관리와 군인의 비위를 맞추는 조선 문인들의 현실에 낙담한다. “차라리 제소리 외에 옮길 줄 모르는 개돼지가 명예스럽다”고 자조한다. 하지만 그는 “너희가 황국신민으로서 충성하지 않을 때 이 칼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동포 일본군 중좌가 부민관에서 행한 연설에 위협을 느끼고 강원도 철원 인근 산골로 숨어든다.

그러나 그곳도 주재소 조선인 순사가 “경방단 등을 빼주었으면 출정군인 장행회(壯行會)라도 나가 신민의 도리를 다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다그치는 통해 어쩔 줄 모른다. 임진강에서 낚시로 시국의 화를 피하려던 그의 생각은 어긋나고 만다. 그는 서울에 있을 때 청년들에게 불온한 사상을 심어주는 인물로 찍혀 가택수색을 받곤 했다. 동대문서 스루다 형사는 “시국을 위해 왜 아무것도 안 하무니까”라고 윽박지른다. 그런데도 청년들은 그의 작품에 영향을 받아 “원수 일본을 위해 징집되어 죽임을 당하는 것이 너무 원통하고 분하다”라고 털어놓는다. 실제 자살한 청년도 있었다고 묘사했다. 현은 1년 내 일제는 패망할 것으로 확신했다. 정의와 역사의 법칙을 믿자고 스스로 되뇌었다. 해방이 불쑥 찾아왔다.

2013년 2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취임을 앞두고 최순실과 정호성 전 비서관이 대통령 취임사 초안을 놓고 나눈 대화 녹음이 공개됐다. 최순실이 “그걸 뭐라 그래야 되지. 문화 강국을 만드는 거…”라고 묻자 박 전 대통령이 “그리고 문화융성을 통해 새로운 희망시대를 열어갈 것입니다…”라고 답한다. 그해 7월 대통령직속 정책자문기구 문화융성위원회가 출범했다. 내로라하는 문화예술인들이 위원 완장을 찼다. 그리고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가 돌았고 정권 입맛에 맞지 않는 이들이 배제됐다. 영화 ‘기생충’으로 칸 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도 이 명단에 포함됐었다. 역사의 법칙을 믿고 살자.

전정희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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