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를 적으로 간주해 이성보다는 감정으로 막말을 퍼붓는 정치가 원인
반동적 원한감정인 르상티망에 사로잡혀 복수를 꿈꾸는 현실 때문에 정치마저 실종돼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정치에 쏠려 있는데 실상 정치에 관한 말은 하지 않는다. 말을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말하기를 꺼린다. 어느 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뜻밖의 경험을 했다. 한 친구가 다짜고짜 나에게 정치적으로 어느 진영에 속하는지를 물었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질문에 대략 난감했지만 질문의 의도를 듣고 나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의 정치적 진영을 확인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얘기했다가는 십중팔구 싸움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말싸움으로 감정이 상해서 결국은 관계가 소원해지거나 깨진다니 정치 얘기를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이다.

정치가 우리 시대의 ‘터부’가 되고 있다. 친구들이 모였을 때도 정치 얘기는 하지 않는다. 물론 같은 진영이라는 것이 확인되면 오가는 말이 증폭돼 한풀이하듯이 센말과 막말을 쏟아낸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대부분 입을 굳게 다문다. 집안사람들이 모였을 때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위태롭게 유지하고 있는 유대와 친밀성을 해치지 않으려면 집안에서는 가능한 한 집 밖 정치 얘기를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는 점점 더 금기시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터부(taboo)는 어떤 사회에서 극도로 혐오스럽거나, 아니면 극도로 신성하다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 말하거나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을 말한다. 터부를 침범하면 자신만 재앙의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이나 공동체에도 재앙을 가져온다. 이처럼 재앙의 전염성이 매우 높은 것을 강하고 확실하게 금지하는 것이 터부이다. 정치에 관한 말이 우리 사회의 공동체를 깨뜨린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정치의 터부화는 쉽게 이해된다.

그렇다면 누가 정치를 터부로 만드는가. 도대체 어떤 경험을 겪었기에 정치에 관한 말을 극도로 꺼리는가. 언뜻 정치적 담론의 과잉처럼 보이는 작금의 막말 경연을 보면 그 답이 보인다. 서로를 ‘친일파’와 ‘빨갱이’로 지칭하며 치고받더니 이제는 한쪽에서 ‘사이코패스’라고 공격하면, 다른 쪽에서는 ‘한센병’이라고 응수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막말과 험한 말로 국민 혐오를 부추기는 정치는 희망을 줄 수 없다”고 말하면, “보복정치는 희망 주나?”라면서 ‘내로남불’을 꼬집는다.

막말 정치는 분명 정치적 재앙이다. 한편으로는 자기 말만 하고 남의 말은 듣지 않기 때문에 이성적 논의를 불가능하게 만들어서 재앙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막말이 혐오 감정을 확산해 공동체를 파괴하기 때문에 재앙이다. 비판과 비방을 구별하지 못하는 막말은 우리의 정치문화를 병들게 한다.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이 극단적으로 대립한 상황에서 그 책임을 가리기는 결코 쉽지 않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통합 정치의 실종’이 극단적 정치 대립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문 대통령이 약속했던 국민 통합은 간 곳 없고 갈등과 분열이 일상사가 됐다.

대립은 항상 감정을 상하게 한다. 감정이 상한 사람들은 문제를 이성적으로 대하지 않는다. 상대방에 대한 반동적 대응은 원한 감정을 야기한다. 우리 사회는 지금 진영의 극단적 대립으로 인한 정치적 감정의 과열로 일촉즉발의 위험사회로 퇴보하고 있다. 니체는 권력의 강자에 대한 약자의 반동적 원한감정을 ‘르상티망’이라 했다. 르상티망은 우선 자신과 다르면 무조건 적으로 간주한다. 정치가 본래 “적과 친구를 구별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정치적 적은 자신과 단지 입장만 다르다는 점에서 공적인 적일 뿐 결코 제거해야 할 사적인 적은 아니다. 정치적 상대방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르상티망이 생긴다.

르상티망이 정치적 재앙을 초래하는 것은 원한감정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성보다는 감정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같은 진영에 속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강한 연대감을 느끼기 때문에 지지하면서도 왜 지지하는지 이유를 모르기도 한다. 상대방을 비판할 때에도 그의 정치적 행위의 옳고 그름은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 그가 다른 진영에 속하기 때문에 공격하는 것일 뿐이다. 이처럼 공격의 목표가 ‘정치적 행위’보다는 다른 진영에 속한 ‘사람’이 될 때 비판은 비방과 혐오로 변질한다.

르상티망의 핵심은 원한감정이 약자들의 정치적 반응이라는 점이다. 강자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이 가치를 통해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강자는 능동적으로 포용하고, 약자는 반동적으로 복수한다. 강자는 대화를 하고, 약자는 대립한다. 상대를 비방하고 혐오함으로써 자신의 힘을 드러내고자 하는 르상티망은 약자의 정치다. 이런 원한감정에 사로잡혀 복수를 꿈꾸는 현실이 정치를 터부로 만들고 있다. 미래에 대한 이념과 정책의 대결이 정치일진데 정치가 실종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정치가 필요한 상황에서 누가 정치를 터부로 만드는가?

이진우(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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