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목요일 늦은 밤 서울 용산의 한 멀티플렉스. 자정이 코앞인데도 들고나는 인파로 매표소 앞은 혼잡했다. 야근 후 헐레벌떡 뛰어 온 탓에 화장실에 들러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 참느라 혼났네.” “야 그래도 첫날 보러오길 진짜 잘했지 않냐?” “말도 마. 스포 당할까봐 종일 제목에 ‘기’자만 봐도 뒤로 가기 눌렀잖아.” “내 말이. 난 댓글에 당할까봐 뉴스도 안 봤어.” “야 근데 마지막에…”

순간 ‘아 망했다. 그만해!’ 생각하며 잰걸음으로 자리를 피했다. 무엇 때문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달려왔는데 허무하게 당할 순 없지 싶었다. 저들과 꼭 같은 처지였기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내내 인터넷도, 단체 메신저도 피했다. 지난달 25일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봉 감독이 전 세계 언론을 향해 “스포일러를 피해 달라”고 당부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아 이건 개봉 당일에 봐야지’ 결심했었다.

‘스포’라는 줄임말로 사람들에게 더 익숙한 스포일러(Spoiler)는 영화 소설 만화 스포츠경기 등의 줄거리, 중요사항, 반전, 결말 등을 미리 알려줘 감상의 재미를 떨어뜨리는 행위를 말한다. ‘망치다’라는 뜻의 영단어 ‘Spoil’에서 유래한 만큼 감상은 물론 기분까지 망치는 만행으로 취급당하곤 한다.

많은 이들이 스포일러에 진저리를 치는 건 결국 콘텐츠가 대개 ‘닫혀 있다’는 생각에서다. 결말과 반전에 이르는 서사적 장치 하나하나를 궁리하고 해석하는 매 순간이 감상의 재미를 유발한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만 스포일러를 당하더라도 목적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쌓여가는 단초에 더 흥미를 느끼고 이를 풀어가는 방식을 즐기는 이들도 적지는 않다. 마치 책을 읽을 때 머리말부터 착실히 한 장 한 장 넘기는 정통파와, 읽다가 궁금해지면 결말을 뒤적이고 다시 앞으로 오락가락하는 성미 급한 독서의 차이랄까. 뭐가 더 나은 감상법인지 우열을 가릴 순 없다. 하지만 영화감상만큼은 아직 고지식하게 ‘백지상태’에서 즐겨야 더 만족스럽다는 측이 우세인 것 같기는 하다.

영화는 만족스러웠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처절한 냄새. 찝찝한 여운과 풀리지 않는 메타포가 뇌리를 휘감았다. 극장 계단을 내려오는 내내 감독의 바람대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한 번 더 봐야겠다’는 생각에 도달했을 때, 불현듯 쓴웃음을 삼켰다. 영화관을 나서면서 줄곧 하루 종일 스포일러를 피하려 애썼던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주요 포인트를 미리 알고 봤다면 어땠을까. 이해의 폭이 더 넓었을까.

사실 개봉 당일 영화 관람이 그날만의 특별한 일탈은 아니었다. 얼마 전 마블 유니버스의 한 시대를 마무리했던 ‘어벤저스:엔드게임’ 역시 공교롭게 야근 날 개봉했었다. ‘스포가 싫다’며 퇴근 후 달려갈 준비에 유난을 떠는 후배에게 한 선배가 한심하다는 듯 한 마디 툭 던졌다. “아니 그거 뭐 별거라고 오밤중에 줄 서서 보느라 호들갑이냐. 재밌는 건 나중에 봐도 다 재밌어.” 그땐 속으로 ‘이 양반 별걸 다 삐딱하게 보시네’ 생각했지만 이젠 왜 그렇게 말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따지고 보면 인생 역시 스포일러 투성이 아니던가. “군대 별거 없어.” “회사 생활 별거 아니야.” “결혼하면 별거 있게? 다 끝이야.” 앞서 간 선배들의 훈수에 ‘인생 1회 차’ 후배는 매번 두려움과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네 삶은 매 순간 ‘별거’였고, 여전히 매일이 싱숭생숭 새롭기만 하다.

1992년 발매된 김국환의 ‘타타타’는 당시 시청률 60%에 육박했던 국민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의 삽입곡으로 쓰였다.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냐는 듯 한 후렴구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앞세워 그해 가요상을 휩쓸고, 한 시절을 풍미했다. 노래는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는 유명한 도입부로 시작해 사랑과 인생이 무어냐고 자문한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연히 들려온 ‘타타타’의 후렴구는 예술과 삶에서 ‘스포가 뭐길래’라고 묻는 것만 같았다.

“한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우리네 헛짚는 인생살이 한 세상 걱정조차 없이 살면 무슨 재미… 그런 게 덤이잖소.”

정건희 산업부 기자 moderat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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