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두글자 발견 : 열망] 욕망 갈망을 넘어 열망케 하라

픽사베이

꿈꾸지 않는 사람들에게 ‘열망’은 낯선 단어이다. 획일화된 꿈을 꾸고, 모험과 도전을 하지 않는 이들에게 “가슴 벅차게 열망하는 것이 있냐”고 묻는 것이 어쩌면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루고자 하는 강력한 열망이 없다는 것은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것과 같기에 우리는 욕망을 갈망으로, 갈망을 열망으로 재정향시켜야 한다. 욕망, 갈망, 열망은 조금씩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겐 의미가 깊은 단어들이다.

욕망이 열망 되려면

일반적으로 기독교에서 욕망을 부정적인 것, 혹은 제거해야 할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새라 코클리의 생애와 신학을 담은 ‘욕망, 기도, 비움’(마다 바름)을 쓴 고형상 박사는 욕망이 없다면 인간은 성령의 이끄심을 따를 수도, 기도할 수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비울 수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험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는 책에서 “신앙과 신학이 가능한 것은 인간에게 근원적인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코클리의 주된 신학적 관심사는 인간의 타락한 욕망을 하나님을 향한 욕망으로 재정향시키고 변형시키는 데 있다”라고 말했다.

‘욕망’이란 부족함을 느껴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싶고, 무엇인가를 성취하고 싶고, 무엇인가를 경험하고 싶은 마음이다. 건전한 욕망은 나쁘지 않다. 문제는 지나친 욕망이다. 욕망이 욕심이 되고, 욕심이 탐욕으로 발전하면 죄가 된다. 성경은 탐욕을 경계한다(엡 5:3).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고 했다.

“믿음이 있느냐?”와 “갈망이 있느냐?”는 또 다른 차원의 신앙적 질문이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따르겠다는 의미이다. 반면 갈망을 하고 있다는 것은 받아들임의 차원을 넘어, 자신을 던져 그 무엇을 추구하겠다는 의미이다. 따르는 삶과 추구하는 삶은 분명 방향은 같을지라도 목적지는 다를 것이다.

손종태 목사는 ‘갈망’(국민북스)에서 갈망은 창조주를 향한 인간의 근원적 목마름이며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나를 만드신 하나님께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신 본질적인 갈망 중 하나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 내 삶의 운명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것을 찾고자 하는 본능적인 갈망이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것을 찾을 때만 진정한 만족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욕망과 갈망 사이에 서 있다. 성경은 욕망이 갈망으로 바뀌기까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7)고 권면한다.갈망을 지나 열망으로 나가야 한다. 열망은 영성 생활에 꼭 필요하다. 성령께서는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 3:15)고 하셨다. 갈망과 열망이 없는 상태에선 어떤 좋은 일도 일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타는 목마름으로 주님을 열망하는 예배자들도 찾기 어렵다. 목회자들은 자신의 열망에 귀 기울이라고 조언한다.

성경에 욕망을 갈망으로, 갈망을 열망으로 바꾼 인물이 있다. 세리 삭개오는 가난한 사람들의 돈을 착취해 자신의 욕망을 채워온 사람이었다. 이런 그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길 갈망했다. 돈밖에 모르던 그가 왜 오랫동안 예수님을 만나길 원했을까. 마음속에 채워지지 않는 진정성이 항상 그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만나길 열망했던 삭개오(나무 위). 그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그린 성화.

그는 ‘순수하다’는 뜻의 삭개오란 이름을 사용했지만, 이름과는 정반대로 사는 자신을 볼 때 번민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길 열망했다. 예수님을 만나면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모든 사람이 호기심으로 예수님을 만나러 왔지만 그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키가 작은 그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무시하는 삭개오에게서 열망을 보셨다. 그리고 그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라고 말씀하셨다. 삭개오는 이 말씀 한마디로 삶의 방식을 바꿨다.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기도는 부록 아닌 본질

복음에 대한 열망이 없으면 영적 성장은 어렵다. 안주하는 것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갈망을 열망으로 끌어내는 영적 도구이다. 세계적인 여성 신학자 새라 코클리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는 지난달 말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시편 27편은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기본주제”라고 전했다.

그는 “그간 에로스 곧 욕망은 아가페의 금욕주의에 밀려 억압받았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 표출되는 우리 신앙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욕망(열망)”이라고 역설했다. 또 그는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마 6:21)라고 전하며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강조했다”는 것을 말했다.

그는 “우리가 가진 열망은 하나님이 주신 본성이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참된 갈망과 더불어 이웃과의 관계도 행복으로 이끌고 정결하게 한다. 또 열망은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는 마음이다. 성령께서 내 속에서 일깨우시는 열망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하나님의 갈망을 이해할 때, 인간은 제대로의 길을 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무엇을 간절히 구해야 하는지를 올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부에게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래리 오스본 목사는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진짜 믿음’을 찾으라고 권면했다. “지금이 가장 악한 시대라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당신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다. 자고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시대는 없었다. 어느 시대나 사람들은 지난날을 돌아보며 ‘좋았던 그때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가짜 믿음은 넘어지면 일어날 줄 모른다. 그러나 진짜 믿음은 계속해서 쓰러져 있기를 거부한다.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다시 일어선다.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전진할 방법을 찾아내라.” (‘바벨론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두란노) 중에서)

우린 지금 잃어버린 열망을 되찾아야 한다. 다시 부흥에 목말라 해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가 넘치는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목회자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택하시고 불러내신 분에게로 우리가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 무엇인지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열망에 하나 더
“신성한 갈망과 열망 일치되는 통로는 기도”


새라 코클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신성한 갈망과 우리의 열망을 일치시키는 통로는 기도”라고 말했다.

지난달 말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그는 “모든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욕망을 점검하고 조정하는 행위로서 의미를 지닌다”며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에게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갈망(desire)이 지닌 신적인 뿌리들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는 시간이며 하나님의 공간이 열리는 장소이다. 기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문제에 몰두하기를 멈추고 오직 하나님만을 갈망(열망)하게 된다. 코클리는 이런 기도가 우리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준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성령이 이끄시는 기도를 통해 전능한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근원적인 연약함과 마주하기 때문이다. 이런 연약함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힘의 북돋움’을 경험한다. 이 힘은 세속적인 힘과는 다른 새로운 힘으로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복종시킬 때만 경험되는 것이다. 코클리는 이를 ‘취약성 안에 있는 힘’이라고 부른다.

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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