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정원이 남아돌아도 오히려 심해지는 명문대 경쟁
극단적 ‘지위 불안’ 사회인 한국의 기형적 현상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신분 차별을 고치지 않고서는 과잉경쟁도 해소할 수 없다


한국은 극단적인 ‘지위 불안’에 시달리는 사회다. 학기 말 성적을 공개하면 B 학점 받은 학생들이 이메일을 보내 C로 내려달란다. 그래야 재수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생들이 성적에 매달리는 이유는 올 A를 받아야 입학할 수 있다는 로스쿨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로스쿨 졸업생의 절반은 변호사시험에서 탈락한다.

중세 농민들에게 봉건 영주의 착취는 고통이었지만 이런 지위 불안은 없었을 것이다. 노력한 만큼 소출이 나오니 남들과 비교할 필요가 없었고, 자연과 상호작용하는 노동이 삶의 원형이었다. 그런데 스위스의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의 지적처럼 우리는 ‘지위 불안’에 시달린다. 조직사회의 경쟁은 토너먼트 경기 같아서, 내가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보다 ‘남과 비교해’ 얼마나 더 잘하느냐에 따라 취업, 승진, 연봉이 정해진다. 능력주의 경쟁이 내 지위를, 그리고 내 지위가 만족감을 결정한다. 지위에 대한 욕구는 재능 계발을 촉진하고 남보다 나아지려 노력하게 만드는 동력이지만 지나치면 독이 된다.

일본도 한국 못지않게 성취 지향적인 나라지만 2017년 기준 대학진학률은 54.7%에 불과하다. 두 나라는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으나 1990년대 초부터 한국의 대학진학률은 계속 높아져 일본을 압도했고, 이제는 하락 추세라지만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면 일본 사람들은 왜 대학에 가지 않는 걸까. 일본의 많은 젊은이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전수학교에서 직업훈련을 받는다. 그런데 우리는 1980년 대학졸업정원제를 도입해 일거에 대학 정원을 두 배로 늘렸다. 권위주의 정권이 취약한 정치적 정당성을 포퓰리즘 입시정책으로 풀어낸 결과였다. 1990년대 문민정부는 아예 대학 설립을 자율화해서 대학정원을 무한정 늘렸다.

문제는 대학 교육이 지위재라서 공급을 늘려도 높은 서열 대학 졸업장을 둘러싼 경쟁은 오히려 격화된다는 점이다. 학력 기준은 계속 상승하지만 하는 일은 달라지지 않는다. 과거에는 고졸자들이 하던 일을 이제는 대학원 졸업자들이 하겠다고 서로 경쟁한다. 온 국민이 ‘레드퀸 효과’에 시달린다. 레드퀸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항상 달리고 있는 빨간 모자 여왕이다. 앨리스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레드퀸이 옆에서 똑같은 속도로 달려 정지해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 데서 유래했다. 계속 앞서가려는 상대에 맞서 속도를 내지 못하면 결국 무너지고 만다는 것.

지위 경쟁이 강하다 보니 모두가 대학에 진학하지만, 대학 교육이 졸업 이후 삶의 문제들을 풀어나갈 수 있는 뛰어난 능력과 기술과 자격을 부여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대학을 가지 않으면 마치 조선 시대 양반이 아니면 신분적 차별을 받았던 것과 같은 사회적 차별이 두렵기 때문인지 곰곰이 따져볼 일이다.

교육문제의 해결책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그 답은 너무 쉽다. 첫째, 모든 학생이 당장 선행학습을 중지하기로 온 국민이 합의하면 된다. 하지만 누군가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남들보다 앞서야 한다는 일반적 정서를 단숨에 없앨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고등학교 과정을 이미 중학교 때 배우고, 급기야 유치원에서부터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남들보다 앞서기 위한 경쟁적 선행학습인데, 지위재를 둘러싼 경쟁이다 보니 사회적으로 늘어나는 생산성은 없는데도 불구하고, 경쟁 자체를 위해 엄청나게 교육 비용을 지출하는 것이다.

둘째, 독일의 초등학교에서처럼 6년간 담임을 맡은 교사가 아이들의 적성과 능력을 관찰해 대학에 갈지, 마이스터 교육을 받을지 정해주는 것도 해법이다. 학교의 역할에는 지식과 기술을 가르치는 ‘교육’ 기능도 필요하지만, 진로를 정해주는 ‘선별’기능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했다가는 전국적으로 불복 소송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행 추계에 의하면 대졸자에 걸맞은 좋은 일자리는 500만 개 정도인데, 대졸자는 1000만명을 넘어섰다. 전형적 공급과잉이다. 그러나 이들이 일손이 부족해 외국인 연수생을 수입해서 채워야 하는 중소기업의 생산직에는 가지 않는다. 눈높이가 맞지 않고 기술을 배울 기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일하지도, 구직활동도, 교육 훈련도 받지 않는 캥거루족, 즉 니트족 규모가 170만명을 넘어섰다.

우리는 왜 이렇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바보같이 사는 것일까. 함께 동의하면 단번에 끝낼 수 있는 경쟁을 끝없이 지속하고 노동시장과 따로 노는 교육 시스템을 고집하는 것일까. 노조의 보호를 받는 대기업 정규직에 비하면 같은 일을 해도 40% 임금밖에 받지 못하는 비조직화된 중소기업의 비정규직. 이런 신분 차별을 고치지 않고서는 과잉경쟁도, 지위불안도 해소할 수 없다. 교육 관료의 이해관계에 포획된 ‘대학 길들이기 정책’만 보이는 요즘, 근본적이고 종합적인 인적자원개발정책의 빈자리가 너무 크다.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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