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짙어지기 전 선풍기를 새로 사기로 했다. 서둘러 다녀와야겠다는 다짐과는 달리 가전제품 매장에서 오랫동안 머뭇거렸다. 생각보다 종류가 많았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비슷해 보이는데 가격이 다른 것도 있었다. 옆에 있던 점원에게 이유를 물어봤다.

“여러 가지 바람을 선택할 수 있거든요. 수면풍과 초미세풍까지 가능하답니다.”

그러고 보니 조작부가 서로 다르게 생겼고 버튼도 한쪽이 더 많았다. 크기나 기능, 에너지효율 등급까지 같았지만 많은 종류의 바람을 내보내는 쪽이 비싸도 더 인기라고 했다. 그러자 강한 바람과 약한 바람 두 가지뿐인 선풍기는 어딘지 모르게 좀 무심해 보였다. 최근 한 화장품회사는 피부 상태에 따라 골라 쓸 수 있도록 스무 가지 크림을 출시해 호응을 얻었다. 매운맛을 단계별로 나눠서 취향에 맞게 선택할 수 있는 식당의 반응도 뜨거웠다. 어쩌면 존중받는다는 느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쓰는 말도 세밀하게 구분해줄 때 더 가치 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표준국어사전에 수록된 어휘는 약 50만개라고 한다. 비속어나 전문용어, 유행어까지 생각해보면 우리가 쓸 수 있는 어휘는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일상에서 쓰이는 어휘는 얼마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불이 꺼진 상황을 두고 ‘어둡다’라고 표현하지만 사실 어둠을 표현하는 어휘는 훨씬 다채롭다. ‘어둑하다’도 있고 ‘캄캄하다’나 ‘어스레하다’도 있다. 모두 같은 의미인 것 같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각각 다른 뜻을 품고 있다. 어둑하다는 제법 어둡다는 뜻이고 캄캄하다는 아주 까맣게 어둡다는 뜻으로 깜깜하다보다 거센 느낌을 준다. 어스레하다는 빛이 조금 어둑하다는 뜻이다. 비만 하더라도 소나기와 장마만 있는 게 아니다. 사전에서는 가랑비, 이슬비, 안개비, 부슬비, 여우비, 무더기비, 장대비처럼 비를 섬세하게 구분해놓고 있다. 단 하나의 어휘로 상황을 표현할 때보다 다양한 층위로 나눠서 접근할 때 명확한 이해가 가능하다.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병원에 갔을 때였다. 배가 아파서 왔다는 말에 의사는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아프신데요?”

무엇을 먹었는지 물어볼 줄 알았던 나는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괜히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그러니까 쿡쿡 찌르는 것처럼 아프세요, 아니면 쥐어짜는 것 같으세요? 그것도 아니면 무언가 꽉 차서 짓누르는 느낌이세요?”

그제야 좀 더 구체적으로 아픔을 전할 수 있었다. 아픔을 뭉뚱그려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잘게 쪼개고 구분해서 살펴보는 일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효율’이나 ‘편리함’ 때문에 대상을 그저 하나의 덩어리로 바라볼 때가 잦다. 수많은 감정마저 그저 ‘대박’이나 ‘헐’이라는 말 안에 욱여넣어 표현해버리곤 한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상처받기도 하고 갈등과 불화로 번지기도 한다. 그 누군가는 언제든 내가 될 수도 있다.

건성으로 바라보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깊어지기 마련이다. 세탁소를 운영해온 아버지는 얼룩을 대할 때마다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커피가 묻었으니 지워 달라는 말에도 여러 번 질문을 덧붙였다. 커피에 우유가 들어갔는지, 차가운 커피였는지, 시럽은 들어갔는지, 얼마나 오래된 얼룩인지. 그쯤 되어야 아버지는 얼룩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버지와 의사의 모습에서 나는 사람을 마주했던 순간을 돌이켜봤다. 이제껏 단순하게 평범한 사람이나 쾌활한 사람 혹은 내성적인 사람으로 분류한 다음 그대로 굳어지게 내버려두진 않았는지. 상대방을 잘못 판단하고 오해하는 일은 동시에 내가 오해받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알고 보면 슬픔이나 불안만으로 규정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슬픔과 불안을 더 정밀하게 나누고 나눠야 비로소 그 사람에게도 내게도 가까이 닿을 수 있다.

결국 나는 열두 가지 바람을 선택할 수 있는 선풍기를 사기로 했다. 언젠가 다시 병원을 찾게 되면 예전보다 더 풍성한 문장으로 아픔을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을 마주했을 때도 촘촘한 질문을 던질 수 있겠다. 질문이 이어지다 보면 막연하기만 했던 위로나 배려에 성큼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공감이 부족한 시대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미 알고 있다고 단정지었던 대상을 더 세세하게 나누고 온전하게 바라보는 일이 아닐까.

전석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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