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적인 동영상 편집으로 아무 잘못 없는 여경 비난한 이면에는
남성중심주의 있어 또 일자리 둘러싼 성별 갈등이 표출된 건 아닐까
유디트에 대한 해석에서 보듯 근현대사는 남녀평등 향해 진전해왔다는 점 명심해야


‘대림동 여경’은 어찌됐을까? 자신의 모습이 담긴 CCTV 영상이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 나돌았던 그녀, 아연 ‘여경 무용론’의 화신으로 부상해 신상털기를 당했던 그녀 말이다.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다 서서히 대중의 관심사에서 멀어지고 있는 그녀를 떠올리게 됐다.

뉴스를 훑어봤더니 그녀는 그사이 휴가를 다녀왔다. 악성 댓글을 단 누리꾼들을 고소했다. 휴가 간 사실을 친절히 알려준 건 악플러들이다. 그렇게 사생활이 발가벗겨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차분히 대응할 줄 아는 강단을 가진 여경이었다.

문제의 영상을 봤다. 둘 다 남자 경찰이었다면 ‘취객 제압 경찰·시민 공조’ ‘민중의 지팡이 경찰의 고된 삶’ 등 미담으로도 포장됐을 영상 같았다. 더욱이 경찰의 뺨을 때리는 취객이라니. 경찰의 노모가 봤다면 가슴이 미어졌을 장면이었다.

여경 무용론은 ‘여성’이 ‘실수’하기를 기다리는 우리 사회 마초주의 남성들이 만든 프레임으로 다가왔다. 전체 1분 59초짜리 동영상 중 거두절미하고 편집해 영상을 올린 ‘전략’이 그렇다. 여경이 무릎으로 취객 1명을 제압한 모습은 잘린 채 무전으로 경찰관의 증원을 요청하는 대목에서 영상을 끝낸 건 다분히 악의적이다. 이른바 ‘마초 사이트’에는 이번 사안과 관련해 여성 혐오적 언어가 넘쳤다. “XXX들이 자꾸 남자한테 기어오르는 이유” “요즘 계집애들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들의 열등함을 경험해 본 적이 없음” 같은 문구에서 허세 뒤에 숨긴 남성들의 불안과 공포가 느껴졌다.

근현대사는 남녀평등을 향해 전진해온 역사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과 여라는 성별의 차이는 일종의 계급적 차이였다. 또 한 사안을 두고 남녀가 뚜렷한 시각차를 보여주며 갈등해온 역사이기도 했다. 미술사 거장들의 작품이 이를 증거하기도 한다. 성경 속 인물인 유디트에 대한 해석이 대표적인 사례다.

유디트는 구약성서 외경(外徑)에 등장한다. 이스라엘을 침입한 아시리아군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한 뒤 목을 잘라서 돌아온 구국의 여성이다. 르네상스 들어 거장들이 즐겨 다룬 주제였다. 이탈리아의 카라바조가 그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1571년)가 유명하다. 다른 화가들은 적장의 목이 잘린 이후 유디트가 그의 목을 들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데 비해, 카라바조는 가장 극적인 순간인 참수 장면 자체를 그렸다. 그런데도 그 결정적인 순간, 남성 화가 카라바조가 그린 유디트의 표정은 겁에 질려 있다.

47년 뒤 최초의 여성 화가인 젠틸레스키가 그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1618년)는 전혀 다르다. 목을 치는 순간의 유디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과감하다. 여성 화가의 눈에 비친 여성은 그렇게 완력과 담력이 셌다. 유디트 이미지는 약 300년 뒤 오스트리아 화가 클림트에 의해 다시 전복됐다. 1901년에 그린 ‘유디트’는 발표되자마자 격렬한 논란과 함께 유대인 후원자들의 분노를 샀다. 그도 그럴 것이 유디트는 깊은 신앙심과 용기로 이스라엘을 구한 여성 아닌가. 그런데, 클림트가 형상화한 유디트는 가슴을 드러내고 금박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채 적장의 머리를 들고 있다. 몽롱한 눈빛을 한 채 남자를 유혹한 뒤 파멸로 이끄는 팜므 파탈의 이미지로 변신해 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페미니즘 관점에선 여권 신장이 배경에 있다고 본다. 1879년 초연된 노르웨이 극작가 입센의 ‘인형의 집’을 떠올리면 쉽다. 이 작품은 자신을 인간이 아닌 인형으로 보는 남편의 집을 떠나는 주인공 노라가 갖는 상징성 때문에 페미니즘 운동의 시작으로 거론된다. 여성의 사회 진출로 인해 남성들이 갖기 시작한 불안감이 유디트에 팜므 파탈의 프레임을 씌운 것이라는 해석이다.

다시 대림동 여경 논란으로 돌아가자. 이번 사건은 “본질은 술 취한 사람의 공권력 침해”라는 본질 논란부터 여경 체력검사 선발 기준 강화 찬반 논란까지 가지를 뻗었다. 여경 체력검사 기준이 선진국 수준으로 강화되는 것엔 찬성한다. 동시에 여경 비율을 선진국 수준으로 확장하는 것도 서둘러야 한다. 우리는 2022년까지 15%로 끌어올린다는 목표지만 구미 선진국은 이미 20% 안팎이다.

그런데 이번 사안 역시 심연엔 여성의 사회적 진출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깔려 있지 않나 싶다. 여경들이 치고 올라오듯, 금단의 영역에 여성들이 진출해왔다. 경제가 좋을 때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경제위기일수록 일자리를 차지한 여성은 눈엣가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남성 사회를 지배한 ‘맞벌이 여성 우선 희생론’이 그랬다.

지난 1분기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4월 경상수지도 7년 만에 흑자 행진을 멈췄다. 경제가 나쁜 상황에서 일자리를 둘러싸고 성별 갈등이 이번 사건으로 표출된 것 아닐까. 그런데 인공지능이라는 인류의 더 큰 경쟁자가 출현한 시대에 ‘근육 자랑’은 초등생의 그것처럼 찌질하다.

손영옥 미술·문화재 전문기자 yosohn@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