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주선애 (2) “이 아이 사랑받으며 살게 해주세요”… 할머니의 기도

다섯 아들 잃은 아픔 많은 할머니 기도와 말씀으로 위로 받아… 외롭게 자란 날 불쌍히 여겨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오른쪽)가 1975년 어머니의 고희(70세)를 맞아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어머니는 집에서 10리 넘게 떨어진 교회에 친구들과 함께 놀러 갔다가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였다. 교회는 찬양하고 예배하는 곳에 그치지 않았다. 한글반을 열어 학교라고는 구경도 못한 어린 소녀가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한글을 가르쳐줬다. 글자를 공부하며 써볼 종이가 필요했지만, 당시 형편상 살림을 맡은 오빠에게 연필과 종이를 사달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대신 오빠가 쓰다 버리려 했던 몽당연필과 낡은 창호지로 글자를 연습했다. 신이 난 어머니는 글을 배우는 게 너무 좋아 부엌에서 불을 땔 때 쓰는 소나무 부지깽이로 바닥에 글씨를 쓰며 공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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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는 농가로 시집보낸 첫째와 둘째 딸이 고생하는 게 애처로웠던 것 같다. 막내딸인 어머니만이라도 도시에서 생활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미소를 하는 집과 혼사를 맺으셨다. 16세 신부와 18세 신랑의 결혼이었다. 대가족인 데다 정미소집이어서 일이 오죽 많았으랴. 16세에 시집온 며느리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삶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부엌일을 도맡아서 했고 추운 겨울에도 얼어붙은 대동강 얼음을 깨고 식구들의 빨래를 했다. 손잔등은 하루도 트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 손으로 저녁이면 가족들의 양말을 기우셨다.

그나마 식구들이 건강하기라도 하면 행복했겠지만 하나둘 시름시름 앓아 세상을 떠나는 남정네들을 보며 마음이 어땠을까. 아버지마저 병들어 눕게 됐을 땐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첫 아이를 임신하고도 임신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어른들 모르게 어머니께 과일을 사다 주시곤 했다. 어른들에겐 어려워 말 한마디 못했지만 그런 남편의 보살핌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됐던지 어머니는 두고두고 내게 그 이야길 해주셨다.

나는 서문밖교회 유치원도 할머니 등에 업혀 다닐 만큼 치마폭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여섯 살 때까지 어머니 젖을 먹었다고 하면 다들 거짓말이라며 믿지 않지만 사실이다.

다섯 살쯤 됐을 때 같다. 할머니가 캄캄한 새벽에 가게 문을 열고 나를 깨워 손목을 붙들고 조용히 길을 나섰다. 깨끗하게 정리된 공원길을 한참 걸어가다 보면 모란봉 풀밭이 나왔다.

할머니는 그 풀밭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한참을 혼자 놀다 할머니에게 다가와 보면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동이 트고 햇빛이 할머니와 내가 걸어 온 길을 환하게 비춰줄 때쯤 모란봉을 내려왔다. 그렇게 나는 체험적으로 새벽기도란 걸 알게 됐다.

할머니는 아들 다섯을 다 잃은 아픔을 기도와 말씀으로 위로받으며 사셨다. 늘 성경을 읽으셨지만, 한글을 늦게 배워서인지 잘 읽지 못하셔서 내가 선생님이 돼 드렸다. 유치원에서 한글을 익혀 할머니에게 알려드리면 그렇게 기뻐하실 수가 없었다.

“아이고 우리 선애는 정말 신통해. 신동이야 신동!” 지금도 그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하나님께 위로를 받으며 쌓아 올린 할머니의 기도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언젠가 내 친구 중 누군가가 어머니께 질문을 던졌을 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우리 주 선생은 가는 곳마다 사람이 따르고 사랑을 많이 받는데 어쩜 그럴 수 있지요”라는 질문에 어머니는 “할머니 기도 덕분”이라고 답하셨다. 그리고 내게 할머니의 기도를 들려주셨다.

“하나님, 우리 선애는 불쌍한 아이입니다. 아버지도 형제도 삼촌이나 사촌도 없는 외로운 아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살게 해주세요.”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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