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싱가포르에서 역사적 만남을 가진 게 지난해 6월이다. 국민일보는 2018년 6월 13일자 1면에 두 사람이 악수하는 사진과 함께 ‘한반도 평화, 위대한 여정이 시작됐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구체적 방안이 없는 포괄적 합의였지만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한 공동성명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선언했고, 전문가의 북핵 검증을 언급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나도록 약속한 평화의 길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전문가들이 걱정했던 모든 난관이 빠짐없이 길을 막았다. 톱다운 협상이니 웬만한 장애는 뛰어넘을 거라는 낙관론은 빗나갔다. 포괄적 합의를 뒷받침할 실무협상에서 답을 찾지 못하자 두 정상이 한꺼번에 해결하는 극적 해법이 다시 시도됐으나 무리였다. 지난 2월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로는 실마리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가끔 청와대나 정부의 고위급 인사가 툭툭 던지는 말 속에서 돌파구를 찾으려는 노력이 진행 중이란 단서를 얻을 수 있지만 그게 전부다.

극적인 반전이 없다면 2019년 하반기 남북관계는 결코 장밋빛이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걸어야 하는 지루하고 팍팍한 오르막 산길이다. 사실 하노이회담 결렬로 문 대통령이 3·1절 기념사를 통해 천명한 신한반도체제 구상은 어긋났다. 금강산 관광·개성공단 재개와 동아시아철도공동체는 동력이 떨어졌다. 총선을 향한 국내 일정도 엉클어졌다. 어렵게 꺼낸 ‘이너프 딜(enough deal)’에는 미국이 고개를 저었다. 국제기구를 우회하는 식량지원은 북한의 시큰둥한 반응에 머쓱해졌다. 문 대통령은 북유럽 3국 순방 중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새로운 구상을 내놓을 생각이지만 2017년 베를린선언처럼 원칙을 강조하는 수준에 머물 것이다.

이달 말 한·미 정상회담에서 돌파구가 만들어질 가능성도 낮다. 그러려면 남북이 먼저 만나야 하는데 북한이 갑자기 자세를 고쳐 앉도록 만들 방법이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정착이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부엌에 들어가 밥상을 차릴 리 없다. 18일 재선 출마를 선언하는 그에게 한반도는 핫플레이스가 아니다. 공약대로 김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했고, 미국 본토를 향한 핵미사일의 잠재적 위협을 막았다. 포인트는 이미 얻었다. 더 많은 포인트가 필요할 때까지는 상황관리가 최선이다. 심지어 ‘내 패 다 알지? 알아서 해’라고 말한다. 북한의 고민은 여기서 출발한다. 핵미사일 위협을 재개하면 포인트를 빼앗을 수 있다. 하지만 트럼프는 빼앗긴 포인트를 만회하려고 카드를 다시 돌릴 사람이 아니다. 대신 판을 엎을 것이다. 이 경우 그가 재선에 성공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당장은 아니어도 반드시 보복에 나설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에 베팅해야 하는가. 당연히 기다리며 정세변화를 살펴야 한다. 김 위원장은 지난 4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마지노선을 연말로 정했다. 약간 급해 보였지만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시점을 찍었다.

위기가 깊어져야 대화가 시작된다는 말은 무책임하고 위험하다. 지금은 2017년과 다르다. 북한이 도발을 다시 시작하고 미국이 제재를 강화하는, 북한을 압박하며 무력대응 가능성을 한껏 끌어올리는 시나리오는 그때 한번으로 충분하다. 최고지도자가 결단하는 해피엔딩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비극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이 패권 다툼을 시작해 북한에도 숨구멍이 생겼다. 한동안 우리에게는 대한민국의 원칙을 천명하고 소걸음으로 꾸준히 가는 길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준비하며 기다리면 반드시 기회가 생길 것이다. 총선을 앞두고 여야 정치인들은 온갖 현란한 말로 남북관계의 성과를 재단하겠지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인내심이다. 비책을 찾는 사람에게는 익숙하지 않아도 참고 지켜보는 게 답이다.

고승욱 편집국 부국장 swk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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