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주선애 (3) “남성 못지 않은 실력과 인격 갖추자” 강조

여성들 교육하면서 남존여비 때문에 남성들 공격하는 식 여권운동 늘 반대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가 1936년을 전후해 정진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할 때의 모습.

날 향한 할아버지의 사랑은 극진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늘 과일과 견과류 등 내가 좋아하는 간식이 베개 옆에 놓여있었다. 할아버지가 준비해두신 특별 간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을 다섯이나 낳아 키웠지만 모두 20대 안팎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어쩌다 나와 멀리 떨어진 시골에 사는 손녀딸 2명만 혈육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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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겨울이 되면 내게 두루마기를 입히고 모자를 씌운 뒤 남대문 거리에 나가시곤 했다. 발길이 많은 곳을 부러 찾아가 사람들이 “그놈 참 잘생겼구먼. 아들 손자요?”라고 물으면 할아버지는 머뭇거림 없이 “예”라고 답하곤 하셨다. 엄연히 여자인 날 남자로 둔갑시키는 상황에 할아버지 두루마기를 세게 잡아당기면 멋쩍은 듯 헛기침만 몇 번 할 뿐이었다.

할아버지는 나를 ‘에미나이(여자아이의 평양사투리)’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늘 “이놈아”하면서 남자아이 부르듯 부르셨다. 그 시절 기억 때문인지 나는 여성들을 교육하면서 남존여비(男尊女卑) 때문에 남성들을 공격하는 식의 여권운동을 늘 반대했다. 대신 “남성 못지않은 실력과 인격을 갖추는 게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유년시절에 신앙생활을 시작한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신앙의 본질을 처음 깨닫게 되는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내게는 친구들과 줄지어 다니며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던 날이 그 순간이었다. 평양의 12월은 혹독하게 추웠다. 유독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더 추워지는 듯했다. 하지만 한파 속에서도 캐럴을 함께 부르는 순간은 온 세상을 녹일 수 있을 듯 따뜻하게 느껴졌다.

새벽 2~3시가 되면 초롱의 촛불을 켜 들고 어른, 아이 30~40명이 떼를 지어 하얀 눈길을 사박사박 걸으며 교인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갔다. 사방이 캄캄해도 교인들의 집만은 등불이 켜져 있었다. 조용히 골목길을 걸어가 불이 켜져 있는 집 앞에 소리 없이 모였다. 캐럴 대장이 시작하는 찬송을 따라 힘차게 불렀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온 교회여 다 일어나 다 찬양하여라.”

적막을 깨고 찬양을 소리 높여 부르는 순간 온몸이 찌릿찌릿했다. 구원에 대한 확실한 체험은 없어도 진정 예수님은 기쁨을 주러 오신 분이며 마땅히 세상 사람들은 주님 오심을 기뻐해야 한다는 신념이 생겼다. ‘새벽송’을 받은 교인은 문을 열고 헌금을 하거나 아이들을 위해 준비해 둔 과자를 꺼내 주기도 했다. 어떤 집에서는 만둣국을 끓여 꽁꽁 얼어 있는 캐럴 대원들의 몸을 녹여 주기도 했다.

캐럴 새벽송이 기쁨과 감동의 순간들로만 기억된 건 아니다. 오래도록 속이 상했던 기억도 있다. 한번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친구들과 새벽송을 준비하고 있는데 주일학교 부장이자 내게는 아버지와 같았던 백부님이 오시더니 “선애 너는 집에 가거라”하셨다. 단호하기만 한 백부님의 표정과 목소리에 나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와 펑펑 울었다.

당시엔 여자아이들이 남자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지 않게 봤다. ‘남녀칠세부동석’이란 관념 때문에 백부님은 내가 새벽송 가는 것마저 금하셨던 것이다. 물론 이후 머리가 크면서 나는 백부님을 설득해가며 캐럴 대원으로 맹활약을 펼쳤다. 여성 찬양리더들이 다양한 무대에서 성도들을 이끄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내 유년 시절엔 없었던 여성 캐럴대장의 모습을 그려보곤 한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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