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과부’ 선교사, 천로역정 조선말로 옮기다

여선교사 해리어트 깁슨과 남한산성

남한산성 수어장대. 1890년과 이듬해 조선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남한산성에서 하기수양회를 겸한 여름휴가를 보냈다. 광주= 송지수 인턴기자

지난주 남한산성 수어장대에 이르는 산길은 실록이 짙었다. 남한산성교회를 출발해 도보로 10여분이면 닿는 곳이다. 수어장대는 수어청(守禦廳) 장관의 지휘소이다. 1624년 인조가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지은 4곳의 장대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문화재다.

수어장대를 향해 오르막을 걷자면 오른쪽으로 한경직 목사가 은퇴(1973년) 후 17년간 기도와 묵상으로 살았던 우거처가 있다. 무엇보다 한 목사의 산속 기도 바위와 수어장대가 가깝다. 병자호란으로 수치의 역사를 안고 있는 남한산성은 한국 기독교역사와 무관할 듯하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믿음의 역사가 서린 곳이다.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이 선교지의 풍토병을 이기고 또 안식을 위해 이곳을 찾곤 했기 때문이다. 1950년 전후 지리산 노고단과 왕시루봉 같은 선교사 휴양 시설로 운영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조선에 파송된 선교사 중 게일, 모펫, 깁슨 선교사 등이 남한산성 정상 수어장대에서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맨 앞이 깁슨, 그 뒤 남자 선교사가 모펫과 게일이다. 깁슨은 1892년 게일과 재혼한다. 옥성득 교수 제공

1891년 여름으로 추정되는 사진 한 장. 여선교사 해리어트 깁슨(1860~1908)을 가운데 두고 게일(奇一·1863~1937)과 모펫(馬布三·1864~1939) 선교사 등이 수어장대에서 포즈를 취했다. 깁슨의 어린 두 딸이 깁슨 양옆에 있는 사진이다.

깁슨은 이 당시 ‘미망인’이었다. 부부는 1885년 6월 남편 헤론(惠論·1856~1890)과 함께 제물포항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와 제중원 등을 중심으로 의료사역을 했었다. 깁슨은 의료 사역을 도우면서 여성 선교와 교육에 힘썼다. 그런데 1890년 여름 남편 헤론이 조선 선교에 헌신하다 이질로 사망한다. 남한산성 빈집에서 죽었다는 설과 서울에서 죽었다는 설이 있는데 사망 직전 남한산성 하기휴양회에 참석했다가 별세한 것만은 분명하다.


깁슨은 ‘헤론부인’으로 불렸다. 그는 헤론이 죽고 1892년 게일과 재혼한다. ‘게일부인’이 됐다. 한국교회사에서 깁슨이 ‘헤론부인’과 ‘게일부인’으로 불린 것은 그만큼 그의 사역에 관한 연구가 미흡하다는 얘기도 된다. 남성사역자의 보조자로만 인식됐기 때문이다. 게일은 1908년 깁슨이 죽자 1910년 재혼했다. 그 재혼 부인 역시 게일부인이었다. 깁슨에 대한 정체성이 불분명해지는 것이다.

저평가됐던 깁슨의 사역을 세상 밖으로 드러낸 것은 옥성득 교수(미국 UCLA대학·한국기독교사)의 연구와 사료 발굴에 힘입은 바 크다. 이를 바탕으로 박형우 김은정 등 후학 연구자들이 ‘여성에 의한 여성 사역’ 분야에서 혁혁한 공로가 있는 깁슨의 헌신을 드러내고 있다.

헤론·게일부인으로 불리던 선교사

‘믿음의 원정대’가 남한산성 기독역사유적지인 한경직 목사 기도처를 둘러보고 있다.

지난 8일 국민일보 주관 ‘믿음의 원정대’ 팀이 조선 초기 선교사의 흔적을 찾았다. 깁슨이 수만 리 타국 땅에서 겪어야 했던 연단에 누구보다 여성 대원들이 깊이 이해하고 동감했다.

1890년 7월. 헤론 부부와 두 딸, 아펜젤러 가족, 언더우드 가족 등 조선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남한산성에 모였다. 한데 의사 헤론은 도성에서 늦게 출발했다.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환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헤론은 1888년 서양인들이 아이를 잡아 약으로 쓴다는 영아소동 때문에라도 본분을 다했다. 헤론은 제중원(현 서울 을지로2가 하나금융그룹 일대)을 나와 광나루를 통해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하지만 식은땀이 나고 소화가 안 돼 가까스로 합류할 수 있었다. 그는 아팠으나 아내 깁슨에게 말하지 않았다. 언더우드 등이 판단해 그를 후송했다. 게일도 동행했다. 게일은 부산에서 선교하던 청년이었으나 헤론이 그를 서울로 불러들였다.

깁슨의 남편 헤론 원장 시절 제중원.

헤론은 이질로 사경을 헤맸고 병간호하던 선교사들은 결국 남한산성에 있는 깁슨이 임종을 볼 수 있도록 게일을 남한산성으로 보냈다. 한밤 폭우가 내렸으나 그들은 이를 뚫고 병원에 도착했다. 깁슨은 울면서 기도했고 헤론은 하나님 품에 안겼다.

그렇게 ‘과부’가 된 깁슨은 조선을 떠날 수 없었다. 남편의 유업을 잇고 싶었다. 깁슨의 아버지는 미국 테네시주의 명망 있는 의사였고, 어머니는 기독교 교육가였다. 헤론은 장인과 장모의 기도에 따라 선교사가 될 것을 결심했었다. 헤론은 테네시의대 수석 학생이었고 뉴욕의대에서도 손가락 안에 꼽히던 엘리트였다. 깁슨도 어머니의 뜻에 따라 기독교교육에 힘썼다.

남한산성을 산책 중인 게일(왼쪽)과 모펫. 옥성득 교수 제공

1890년 3월 모펫이 본국에 보내는 선교편지에는 ‘깁슨이 매주 20~30명의 여자가 모이는 성경공부반을 인도하고 세례 문답 교육을 하고 있다’고 썼다. 미국 북장로회 파송 선교사였던 깁슨은 여학교를 세우기 위해 힘썼으나 건강 악화로 학생들을 미 북감리회 파송 스크랜턴 대부인에게 위탁한다. 이들은 훗날 스크랜턴 대부인이 세운 이화학당 학생이 된다. 한편 깁슨은 정치력이 뛰어난 초대 제중원장 알렌의 비선교적 활동에 제동을 걸기도 한다. 또 언더우드 부인과 함께 명성황후의 주치의 역할도 했다. 무엇보다 깁슨은 뛰어난 한국어 실력으로 의료사역에서 한발 더 나아가 여성의료사역 중심에 있었다. 그러다 보니 초대 제중원장 알렌과 마찰이 생겼다.

알렌은 일기에 “모든 분란의 원인에 깁슨이 있으며 그녀의 질투가 남편을 죽게 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가 진취적인 여성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조선에서 과부가 된 그는 남편의 묘지조차 세울 수 없었다. 헤론이 동료 선교사들과 성서번역을 위해 얻은 집 마당, 자신의 집 마당 등에 남편 시신을 임시로 묻으려 하자 장안 서생들이 예법에 없다며 들고 일어났고 타협안이 주한미국공사 뜰에 임시 안치였다. 시신은 결국 지금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된다. 이 묘원은 헤론으로부터 시작됐다. 이 우여곡절에 속상한 깁슨은 혼절하곤 했다.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내 헤론과 깁슨 부부 묘.

깁슨은 양화진에 남편을 묻고 게일 등과 ‘천로역정’ 번역 작업에 착수했다. 총각이었던 게일과 모펫은 깁슨을 흠모했다고 한다. 게일이 적극적이었다. 1891년 여름 연하의 게일은 남한산성에서 사랑을 고백했고 이듬해 모펫의 적극적 지지 속에 결혼에 이른다.

권총 머리맡에 놓고 자던 ‘미망인’

깁슨의 재혼은 선교사 사회의 충격이었다. 하지만 영아소동 후 흉흉한 민심에 젊은 과부는 늘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두 딸을 보호하기 위해 머리맡에 권총을 두고 잤고, 이도 불안해 일꾼을 수직 세웠다. 이 어려움이 게일과의 재혼으로 해결됐다.

이제 ‘게일부인’이 된 깁슨은 남편을 따라 함경도 원산 사역지로 향했다. 그곳에서 ‘복음을 위해 수고한 여자들’이란 글을 남기는데 이는 그의 여성 사역 열매 이야기다. 깁슨의 원산 사역은 1895년까지였다. 함경도가 캐나다선교부 지역으로 이양됨에 따라 비로소 일본 스위스로 병가를 떠날 수 있었다. 깁슨을 연구한 신학자 김은정은 “남편 선교사의 명성에 가려진 한국교회 여성 선교의 개척자”라고 했다.

사족. 깁슨은 게일과 16년을 살았으나 죽으면서 첫 남편인 헤론과 함께하겠다고 해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헤론 묘에 합장됐다고 한다.

광주(남한산성)=전정희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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