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주선애 (5) 평소 어머니가 점찍어둔 주일학교 선생님과 결혼

젊은 과부로 힘겹게 사셨던 어머니… 사위라도 빨리 맞으려 서둘러 정해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지향하게 해 준 가가와 도요히코의 ‘사선을 넘어서’ 책 표지.

여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나는 유치원 보모가 됐다. 요즘 말로 유치원 교사였다. 백부님은 당시 동평양교회의 회계를 담당하면서 동평양유치원을 경영하셨는데 백부님의 추천으로 보모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깜냥이 안 되는 사회 초년생에게 보모 역할이 쉬울 리 없었다. 왠지 부끄러운 마음에 아이들을 돌보고 동화책 하나 읽어주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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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쯤 지났을까. 흐릿하게만 보이던 아이들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이고 표현이 부족한 아이들의 말도 제법 능숙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보모가 될 수 있었다. 정의여자보통학교 시절 비싼 레슨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배우게 해주셨던 피아노 연주는 아이들과 친근하게 만들어주는 최고의 기술이었다. 두렵게만 느껴졌던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 기대되고 기다려지는 길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보모로 함께 일했던 분들에게 교육과 삶에 대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어 행복했다. 돌아보면 평생 유치원에서 일하다 나이가 들면 유치원 원장을 맡으며 동심 천국으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기도 했으니 그 행복함의 크기가 작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활하던 중 생각지 못한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 나의 주일학교 선생님이었던 최기호 목사는 당시 평양신학교에 다니는 전도사였다. 어머니는 그를 훌륭하게 보고 계셨고 내 신랑감으로 점찍어 뒀다고 하셨다. 젊은 과부로 힘겹게 사셨던 어머니였기에 사위라도 빨리 맞으려고 서둘러 정하셨던 것 같다. 최 목사가 여러 차례 나에 대한 호감을 표하기도 했다. 생각지도 못한 결혼이어서 덜컥 겁이 났지만, 어머니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의 목회지였던 동광교회에서 결혼식을 하고 어머니를 모시며 살게 됐다.

최 목사는 신앙 열정을 가진 진실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기도가 삶의 중심이었고 검소했다. 유치원 보모를 처음 맡을 때처럼 두려움으로 시작했던 결혼 생활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고 남편으로서 최 목사를 존경하게 됐다. 교인들은 앳되고 어린 날 사모라는 이름으로 불러줬다.

당시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일으키고 아시아 전역을 침략해 들어가면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더욱 심해졌다. 예배 때마다 전 교인이 일어나 동방요배(천황을 향해 절하는 것)와 황국신민서사(일본이 조선인들에게 외우게 한 맹세)를 해야 했다. 그러던 중 평양시에 살던 사람들에게 지방으로 가라는 일본 정부의 명령이 떨어졌다. 쫓겨나듯 떠나야 했던 우리 가족은 황해도 장연군 용연면이란 곳에서 농촌 목회를 시작했다.

농촌 생활의 행복 중 하나는 최 목사가 모아 놓은 책꽂이의 책들을 여유 있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여러 권의 책 중 내 생애의 틀을 잡아 줬던 책 하나를 붙들게 됐다. 가가와 도요히코의 ‘사선을 넘어서’였다. 저자는 고난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자신의 고뇌를 해결한 사람이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장 낮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뤄 살았다.

그는 자신의 학식과 재능, 부를 모두 버리고 빈민촌에 들어가 그들과 같은 이불을 덮고 자며 공동생활을 했다. ‘사선을 넘어서’는 그런 자신의 삶을 묘사한 자전적 소설이었다. 그 책에 인용된 성경 구절들이 마음에 부딪히면서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됐다. 책 한 권에도 생의 길을 내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다.

하나님의 손길은 하나의 결단으로 이어졌다. ‘이 무의촌(無醫村)에서 당장 봉사할 일이 무엇일까.’ 의사는 아니라도 산파(産婆) 공부를 해서 동네 사람들을 도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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