멱감을 시냇물이 흐르고 서리할 참외밭이 있어야 고향이란 법은 없다. 어려서 “넌 고향이 어디니” 물으면 “둔촌주공 324동이요” 하던 작가 이인규는 2013년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143개동 5930가구 대단지가 재건축을 하게 되자 사라지기 전에 그 모습을 기록해두는 일이었다. 구석구석 사진을 찍고 얽힌 이야기를 엮어 다섯 권의 책이 만들어졌다. 프로젝트에 동참한 비디오그래퍼 라야는 다큐영화 ‘집의 시간들’을 지난해 상영관에 올렸다. 둔촌주공의 여덟 집을 찾아가 세월의 흔적을 카메라에 담았고 집과의 이별을 준비하는 주민들의 목소리를 입혔다. 1980년 지어졌으니 40년이 됐다. 집을 촬영했는데 본 사람들은 기억을 기록한 영화라고 말한다.

다섯 살 때 이사한 이곳에서 어른이 됐다는 일러스트레이터 김민지는 그림책 ‘나의 둔촌아파트’를 펴냈다. 주민들이 이주한 뒤 출간된 책을 “고향을 잃어버린 나의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소설가 이승우는 새로 지을 아파트 단지에 ‘난쏘공 공원’을 만들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15년 전 둔촌주공 주민이 됐더니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조세희 선생과 몇몇 소설가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가끔 맥주를 마시고 가끔 조 선생에게 시국과 문학 얘기를 듣는 ‘둔촌동 모임’이 이어졌다. 재작년까지 30년 넘게 이곳에 살았던 난쏘공 작가의 흔적을 어딘가 남겨두면 사람들이 일부러 찾는 동네가 될 수도 있지 않겠냐고, 최근 국민일보 칼럼에 적었다.

둔촌주공은 이렇게 이상한 아파트다. 녹물이 나오는데 나무가 잘려나갈 것을 걱정하고, 새집이 생기는데 어릴 적 놀이터가 없어진다며 카메라를 들이댄다. 이제 ‘사는 것’이 되려는 아파트를 많은 이들이 ‘사는 곳’이라 여긴 듯하다.

이번에는 ‘고양이들의 아파트’란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지고 있다.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의 정재은 감독이 촬영했다. 고양이는 서식지를 잘 옮기지 않아 재건축 철거현장에선 매몰돼 죽은 사체가 흔히 발견된다. 둔촌주공에 살던 길고양이 300마리를 염려한 이들이 모임을 결성했고, 정 감독은 그런 고양이의 시선에서 아파트를 바라보며 다큐를 찍었다. 이들의 활동은 재건축·재개발 동물보호 조례로 이어지려 한다. 서울시는 지난주부터 온라인 여론수렴에 나섰다. 사람이 너무 많이 살아 그런지, 너무 오래 살아 그런지 투기 말고도 다양한 시선이 얽힌 이 재건축 아파트는 이달 말이면 철거가 완료된다.

태원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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