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AP뉴시스

홍콩 역사상 최대 규모인 200만 반중(反中) 시위를 주도해 정부를 굴복시킨 이들은 바로 분노한 청년층이었다. 22년 전 홍콩 주권 반환 이후 중국 정부의 온갖 내정간섭을 직접 보고 들은 홍콩의 10대와 20대는 결국 범죄인 인도법안의 사실상 폐지를 이끌어냈다. ‘우산혁명’으로 불리는 2014년 민주화 시위를 강경진압한 공로로 홍콩 행정장관에 오른 캐리 람은 이번 시위에선 제 역할을 하지 못해 퇴진 위기에 놓였다. 결국 캐리 람은 홍콩 시위 이후 18일 처음으로 “책임은 내가 질 것”이라며 직접 사과했다.

지난 9일부터 세 차례 열린 범죄인 인도법안 반대 시위의 최전선에 선 사람들은 앳된 얼굴의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중국 정부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고글과 마스크를 쓰고 거리로 뛰쳐나와 경찰과 맞섰다. 암호화 메신저 텔레그램을 적극 활용해 구체적인 시위 내용을 확산시키기도 했다. 시위에 참가한 청년들은 BBC방송에 “난생 처음 최루가스를 맞아봤다” “부모님에게 시위에 다녀온 것을 들켜서 쫓겨날 뻔했다” 등의 소회를 말했다.

시위에 참가한 청년 대부분은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간 1997년 이후에 태어났다. 영국 통치 시절은 경험하지 않았지만, 중국의 정치적 탄압과 ‘홍콩의 중국화’ 시도를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인 세대다. 대표적인 사례가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했던 우산혁명을 주도한 혐의로 두 차례 구금된 조슈아 웡(22)과 독립 성향이라는 이유로 피선거권이 박탈된 일부 야당 인사들이다. 2012년 중국이 일명 ‘애국주의 교육’을 의무화하려고 시도했을 때도 젊은 세대의 반발이 거셌다. 홍콩 현지인이 중국 본토에서 유입된 청년들에게 일자리 경쟁에서 번번이 밀려나는 현상도 청년층의 반중 감정을 키웠다.

실제로 홍콩대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18~29세 청년층의 55%가 중국 정부에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 중국 정부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젊은 세대는 13%에 그쳤다. 뉴욕타임스(NYT)는 “홍콩 청년층은 기성세대보다 중국 본토에 대한 친밀도가 확연하게 낮다”며 “홍콩은 중국과 독립된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BBC방송은 “일국양제 원칙이 사라지는 2047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전망했다. 지금의 청년들이 사회 주도층이 되는 시기에 홍콩이 완전히 중국으로 넘어가면 반발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라는 얘기다.

5년 전 우산혁명의 실패를 목도한 청년층은 이번이 홍콩 자치권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기회라는 일념으로 시위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렁이유팅 홍콩교육대 총학생회장은 “우산혁명은 보편적 선거권을 위한 싸움이었지만 이번 시위는 말 그대로 생사의 문제였다”고 NYT에 말했다. 고등학생의 수업거부운동을 주도한 잭 호(17)는 “범죄인 인도법안은 우리 삶에 중대한 위협”이라며 “홍콩 법치를 완전히 훼손하는 처사”라고 강조했다.

범죄인 인도법안 개정을 추진한 캐리 람 행정장관은 이번 사태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시한부 정치인’ 신세가 됐다. 캐리 람은 시위 초기 강경대응 방침을 이어가며 민심에 불을 붙였다. 시민들의 반대에도 법안을 밀어붙이는 그를 두고 ‘홍콩판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캐리 람은 그러나 반대 시위가 격화되자 법안을 무기한 연기하고 시민들에게 공식 사과하며 백기투항했다. 캐리 람은 18일 기자회견에서 “대부분의 책임은 내가 질 것”이라며 “모든 홍콩 시민들에게 가장 진심어린 사과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청년들과 부모 세대가 거리로 뛰쳐나오는 것을 봤다”며 “정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사퇴 의사는 밝히지 않았다. 캐리 람은 지난 16일에도 공식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럼에도 시위대는 시민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캐리 람의 사퇴를 계속 촉구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일단 캐리 람을 지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국면 전환을 위해 행정장관을 교체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친중 성향인 캐리 람은 정무장관 시절 우산혁명을 성공적으로 진압해 중국 지도부의 마음을 사로잡아 행정수반에 오른 인물이다. 모순적이게도 캐리 람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건 또 다른 대규모 시위가 된 셈이다. 그는 지난해 언론 인터뷰에서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꼽아 논란을 자초하기도 했다.

조민아 기자 minaj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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