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동석이 전하고 키운 ‘저항의 불씨’… 교회 통해 경남 각지서 ‘활활’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2부> 독립운동과 한국교회 (20) 배동석과 경남 만세운동

배동석 지사의 생전 모습. 김해3·1독립운동기념사업회 제공

한여름도 아닌데 29살 청년의 등줄기엔 땀이 흘렀다. 옷 속에 숨긴 독립선언서가 땀에 젖었다. 1919년 2월 26일이었다. 일제 경찰의 삼엄한 경비와 검문을 뚫고 기차로 서울에서 마산까지 내려온 그는 의신여학교 교사였던 박명련(일명 박순천)을 만나 땀에 젖은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 경남 지역에 최초로 전달된 독립선언서였다. 세브란스의전 2학년 학생이었던 배동석(1891~1924)은 그길로 다시 서울로 올라와 탑골공원에서 열린 3·1만세운동에 학생대표로 참여했다.

그가 가져온 독립선언서는 경남 만세운동의 불씨가 됐다. 11일 뒤인 3월 9일 함안 칠북면 연개장터에서 경남 최초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김세민 함안 이령교회 장로가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하다 내려온 사위 배동석과 함께 의거를 주도했다.

경남 함안 칠북초등학교 이령분교의 운동장 뒤편에 마련된 연개장터3·1독립운동기념탑 모습. 1919년 3월 9일 이곳 연개장터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함안=임보혁 기자

배동석에 앞서 이갑성(1886∼1981)도 2월 23일 경남 마산으로 내려와 창신학교 교사였던 임학찬 등에게 경남 지역 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서(당시는 독립청원서)에 날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임학찬은 “독립청원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일이 좀 더 진행되면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만으로는 어렵다”며 고사했다. 이갑성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인물이다.

경남에 연고가 없기 때문이라 생각한 그는 평소 알고 지내던 배동석을 찾았다. 그는 김해 출신으로 마산에는 친구가, 함안에는 처가가 있었다. 게다가 그의 부친 배성두(1840~1922) 장로는 1894년 김해교회를 세워 25년째 봉사하고 있었다. 평양 소래교회를 제외하면 한국인이 스스로 세운 교회 중 가장 오래된 곳이었다.

이갑성의 부탁으로 마산에 내려온 배동석은 임학찬을 만나 재차 설득하지만 실패한다. 2월 27일 서울로 돌아가기 전 함안 처가댁을 찾은 그는 장인과 함께 만세운동 계획을 세운다. 거사 날인 3월 1일의 아침이 밝자 이갑성은 임학찬에게 재차 독립선언서를 전달해 달라고 세브란스의전 생도였던 이굉상(1903~1932)에게 부탁한다.

경남 김해 동상동에 세워진 김해읍 3·1만세운동 시위터 기념비 모습. 1919년 3월 30일과 4월 2일 주민들은 이곳에서 독립 만세운동을 펼쳤다. 김해3·1독립운동기념사업회 제공

배동석에 이어 이굉상까지 가져온 독립선언서는 주민 1000여명이 참여한 경남 최초의 만세운동 ‘함안 연개장터 3·9독립만세의거’를 촉발한다. 만세운동의 불씨는 3월 30일 김해로 옮겨붙는다. 이날 밤 9시 김해군청 앞에 모인 배동석 등 주민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그렇게 시작된 김해 최초의 독립운동은 단 하루 만에 2000여명이 참여하는 규모로 커진다. 배동석은 4월 2일 일경에 체포되지만 사람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체포 열흘 뒤인 12일 김해 장유면 무계리장터에선 3000여명이 참여한 김해 최대 규모의 장유만세운동이 일어난다. 이번에는 ‘신문의속’이라는 교육기관을 설립한 김종훤 등 학자들이 주축이 됐다. 이 만세운동은 이튿날 바로 조선총독부에 보고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이 외에도 경남에서는 교회를 중심으로 한 만세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3월 12일과 17일에는 함안 대산교회 성도들이 주도한 평림의거가 일어났다. 4월 3일과 6일 거제도에서는 옥포교회 성도들이 일어섰다. 밀양에선 같은 달 6일 김래봉 춘화교회 장로를 필두로 한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서울로 압송된 배동석은 이듬해 4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출판 및 보안법 위반과 법정모독 죄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눈알과 손톱이 모두 빠지는 혹독한 고문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졌다. 결핵까지 걸린 그는 당시 올리버 R 에비슨 세브란스병원장의 병보석 요청을 통해 겨우 석방될 수 있었다.

김영기 김해3·1독립운동기념사업회 사무처장은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배 지사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흔들림 없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면서 “그만큼 신앙이 깊고 의지력이 강한 분이었다”고 말했다.

호적 등본에는 배동석이 1924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고 나오지만 정확하진 않다. 정부는 80년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해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고 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유해는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장 박시영 목사는 “배 지사는 당시 엘리트 중의 엘리트인 서울유학생이었다”면서 “개인의 영달을 앞세우지 않고 조국 독립이라는 시대적 사명 앞에 기독교 신자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돼야 한다는 분명한 책무를 갖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창원·함안=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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