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주선애 (10) 기도하다 천국 가길 원했던 남편… 영원히 가슴에 담아

회복되지 않은 간질병 증세에도 새로운 사역지 생겨 기뻐했던 남편… 새벽기도 후 쓰러져 주님 품으로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뒷줄 오른쪽 세 번째)와 신학생들이 1953년쯤 박형룡 박사와 학교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9월 학기가 시작되면서 남산의 장로회신학교 편입 등록을 마쳤다. 어찌어찌 굶지 않고 세 식구가 먹고살았지만, 생활고가 해결되진 않았다. 전차표를 살 돈이 없어 마포에서 남산까지 꼬박 걸어 다니며 강의를 들어야 했다.

형편상 교과서나 참고서를 마련하기도 힘들었다. 북한에서 공부하던 것보다 고될 수밖에 없었다. 강의를 듣는다곤 하지만 교실은 일본 신사 자리의 가장 넓은 방 다다미 위에 앉아 책이나 책가방을 엎어놓고 책상 삼아 강의를 듣고 적는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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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명으로 구성된 반엔 열대여섯의 여학생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시골에서 올라온 전도사나 월남자들이었다. 어려웠던 시절 은혜를 받고 그 자리에 모인 터라 저마다 신앙 열정이 뜨거웠다. 고려신학교에서 박형룡 박사님을 모시고 서울로 올라온 신앙 동지들이 분위기를 잡고 있었고 몇몇 남학생 중엔 평양신학교를 다녀 낯익은 얼굴도 있었다.

한 학기를 마쳤을 때쯤 경북 영덕 영해교회에서 남편 최기호 목사에게 청빙을 요청해왔다. 교인 20여명이 공동체를 이룬 40년쯤 된 교회였다. 북에서 농촌교회 사역을 하던 시절 간질병 증세를 보였던 최 목사는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강단에서 죽을 각오를 한 사람이라 새로운 사역지가 생긴 것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면소재지에 딱 하나 있는 교회엔 대개 가난한 사람들이 모였다. ‘이 예배당에 어떻게 사람들이 모이게 할까.’ 기도 끝에 내린 결론은 무료 유치원 운영이었다. 교회처럼 이곳에 단 하나뿐이었던 유치원엔 면장 경찰서장 등 마을 지도자의 자제가 모였다. 당시 중학교를 졸업한 교회학교 선생을 조수로 두고 20여명의 아이들을 보육했다.

나는 원장이자 보모 역할을 하며 도시 유치원 못지않게 기독교 교육을 정성스레 했다. 갑작스레 비가 올 때면 아이들을 업고 우비를 씌워 집에 데려다 줬다. 부모들은 그 정성을 감사히 여겼고 우리 가정을 환대해줬다. 농촌의 순박한 젊은이들도 나를 ‘사모님’이라 부르며 잘 따라줬다.

1949년 가을, 여느 때처럼 어르신과 청년들 10여명과 새벽기도회를 마쳤다. 최 목사가 여전히 강대상 밑에 엎드려 기도하는 걸 보고 집으로 내려왔다. 아침상을 차려 놓고 기다리는데 좀처럼 최 목사가 오질 않았다.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산에서 내려온 빨갱이에게 습격을 당했나. 간질 때문에 졸도했나.’

다급한 마음에 어머니와 교회로 내달렸다. 기도하던 강대상 밑엔 최 목사가 없었다. 남편을 발견한 곳은 화장실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쓰러진 남편을 보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어머니는 마을 의사를 찾아 뛰어가셨다.

남편의 몸은 이미 식어 있었고 가슴에만 온기가 남아 있었다. 아무리 이름을 부르고 몸을 흔들어도 반응이 없었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여보, 당신이 승리했군요.’ 남편은 항상 “강대상 밑에서 기도하다 천국 가야 해”라고 말했었다. 죽도록 충성하길 원했던 남편의 모습이 곧 승리자의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웃 마을 목사님과 교인들, 동네 사람들이 모두 찾아와 위로를 전했지만, 그 무엇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오직 주님의 영으로만 나를 위로할 수 있음을 경험했다. 며칠 후 박형룡 박사님으로부터 편지가 한 통 도착했다. ‘남편 최 목사는 하나님께서 불러 가셨지만 주 선생이 최 목사 일을 뒤이어 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니 분발하십시오.’

짧은 편지였지만 확실하고 구체적인 지향점을 발견하게 해준 순간이었다. ‘일어나자. 주님 인도 따라 담대히 가보자!’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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