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시스

오는 23일이면 국내 최고액면 은행권(지폐)인 5만원권이 발행된 지 꼭 10년이 된다. 1만원권보다 가로 폭이 6㎜ 길게 태어난 5만원권은 초기엔 황색 계열이라는 이유로 “5000원권과 헷갈린다”는 우려를 자아내기도 했다. 지금은 금액으로나 장수로나 ‘중심권종’ 위치를 차지했다. 5만원권이 널리 쓰이면서 자기앞수표는 자취를 감췄다.

액면 가치가 높아진 만큼 5만원권은 어느 정도는 비밀스러운 가치저장 수단으로 쓰여 왔다. 환수율(한국은행 발행 창구를 통해 나갔다 돌아오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지만 ‘은닉자금’이라는 인상은 완전히 가시지 못했다. 5만원권은 권력자들의 부정한 거래 속에서, 경조사 봉투 속에서, ‘송파 세 모녀’가 남긴 흰 봉투 속에서 발견됐다. 국민과 함께 울고 웃어온 10년이다.

1만원권으론 힘들다

2009년에 5만원권이 태어난 이유는 ‘1973년생’ 1만원권의 기력이 다했기 때문이었다. 1973년에 비해 1인당 국민소득은 144배, 국내총생산(GDP)은 209배, 소비자물가는 14배가 된 상황이었다. 국회는 2006년 고액권 발행 촉구 결의안을 의결했고, 이듬해 신사임당 초상이 도안으로 선정됐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 의결이 이뤄진 시기는 2007년 12월이었다.

지난달 말 현재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5만원권은 장수로 19억7000만장, 금액으로 98조3000억원이다. 4가지 종류의 은행권이 있지만 5만원권이 장수로 36.9%, 금액으로 84.6%를 차지할 만큼 독보적인 위치다. 한은의 현금사용 행태 조사에 따르면 국민들은 거래용 현금의 43.5%, 예비용 현금의 79.4%를 5만원권으로 보유하고 있다. 5만원권은 소비지출에 43.9%, 경조금에 24.6%가 쓰인다고 한다.

처음부터 5만원권이 환영받았던 건 아니다. 2004년 국회에서는 5만원권 발행으로 불가피해질 현금자동입출금기(ATM) 교환, 위변조 방지시설 마련 등에 6000억원 넘게 필요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됐다. 고액권 발행과 디노미네이션을 함께 검토했던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후일 5만원권에 대해 “서둘러 만든 느낌이 있다” “신사임당을 내세운 것이나 화폐의 질이나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회고했었다.

돌아오지 않는 지폐

환수율이 지나치게 낮다는 지적도 뒤따랐다. 한은에서 빠져나간 돈이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부정한 은닉자금 등 지하경제 확대를 고스란히 방증한다는 우려였다. 수사기관에서는 5만원권이 발행된 2009년 이후 뇌물의 ‘트렌드’가 바뀌었다고 말하곤 했다. 음료수 상자에도 수천만원이 우습게 들어간다는 얘기다. 쇼핑백 하나면 1억원이 전달됐다.

액수에 비해 무게·부피가 줄어든 일은 상징적인 사건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용역업체 경비원 박모씨는 2010년 9월 경남 창원의 경남은행 본점에서 현금수송 업무를 하던 중 지하 1층 금고 앞 복도에서 투명비닐에 싸인 5만원권 신권다발 1만장(5억원)을 들고 달아났다. 5억원은 가로 45㎝, 세로 30㎝, 높이 10㎝ 규모로 포장됐다. 무게로는 10㎏쯤이었다. 법원은 자수한 박씨에게 “견물생심의 마음에서 우발적으로 범행했다”며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5만원권은 기가 막힌 소식들과 함께 찾아오기도 했다. 2011년 전북 김제의 한 마늘밭에서는 110억원 규모의 5만원권 뭉치가 발견됐다. 폭발물 신고가 이뤄진 백화점의 상자, 법조비리 연루자의 대학 사물함, 고액 체납자의 싱크대 밑에서도 5만원권 다발은 등장했다. 국가정보원이 박근혜정부에 건넨 특수활동비도 띠지를 제거한 5만원권 뭉치였다.

2014년 2월 극단적 선택을 했던 ‘송파 세 모녀’가 세상에 남긴 것도 5만원권이었다. 건강 문제로 제대로 일하지 못했던 이들은 흰 봉투 겉에 “주인 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썼다. 서랍장 위에 놓인 봉투 안에는 5만원권 14장이 담겨 있었다. 월세 50만원과 가스비 등 공과금 20만원이었다.


실보다 득이 많다

한은에 따르면 5만원권의 환수율은 지난해 60% 후반대로 높아졌고, 누적 기준으로는 절반을 넘었다. 한은 관계자는 “5만원권이 없다고 해서 지하경제가 생성되지 않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한은은 국세청을 통해 추징금 가운데 5만원권의 비중을 살피기도 했다. 5만원권은 굉장히 일부였고 골드바나 달러화 등 외화, 수표 등이 외려 많았다고 한다.

5만원권의 환수율은 다른 은행권에 비해 여전히 낮다. 다만 ‘교체 수요’도 고려돼야 한다고 한은은 설명했다. 한은 관계자는 “5만원권은 ATM에 채워넣는 수요도 있고 빈번하게 거래되는 1만원권, 5000원권에 비해 물리적으로 훼손될 여지가 적다”고 했다. 귀하게 쓰이는 5만원권의 유통 수명은 1만원권(10년가량)보다 길 것으로 추정된다. 한은은 “신권 교체도 환수율에 영향을 주는데 아직 수명이 다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환수가 더 원활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5만원권이 상용화면서 기껏해야 2주일쯤 유통되다 일회용으로 폐기되던 자기앞수표는 사라지다시피 했다. 정보 교환, 전산처리, 보관 등 수표 때문에 발생하던 사회적 낭비 요인은 거의 소멸됐다는 게 한은의 평가다. 국민의 현금 수요가 늘었지만 제조 비용은 줄었다. 1만원권을 제조할 때와 비교하면 한은의 은행권 제조 비용은 연간 600억원 안팎의 절감 효과를 거뒀다.

한은은 “5만원권 발행으로 국민의 화폐 이용 편의 증대 및 사회적 비용 절감 등 당초 기대했던 정책효과가 대부분 나타났다”고 총평했다. 5만원권의 주인공인 신사임당에 대해서도 “동일 성씨의 남성들로 구성됐던 우리나라 은행권 도안 인물의 다양성 확보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내놨다.

한편 5만원권과 함께 검토됐던 10만원권 발행은 현재 추진되지 않고 있다. 한은 관계자는 “화폐개혁은 말할 것도 없고 고액권 발행은 추진 계획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