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고지도자로는 14년 만에 북한을 방문한 시진핑 주석의 마음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거듭된 자제 요청에도 불구하고 핵·미사일 도발을 계속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시 주석이 격노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미국과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김 위원장이 네 차례나 시 주석을 찾으면서 그 앙금은 가라앉았다 치자. 그렇더라도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열흘도 남지 않은 복잡하고 미묘한 시기에 평양에 가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평양행에 오른 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담판에서 레버리지(지렛대)가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전방위로 압박하는 트럼프에게 중국을 너무 몰아붙이면 북한 비핵화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경고를 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 시 주석의 처지는 위태롭고 궁색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40여년 미·중 관계의 근간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중국이 넘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한 레드라인(금지선)도 거침없이 지우고 있다. 트럼프의 의도가 대중(對中) 무역수지 개선 정도가 아니라 중국의 미래와 경쟁력의 싹을 자르는 기술패권 확보에 있음이 분명해졌다. 트럼프는 중국이 핵심이익이라고 선언한 남중국해, 대만에 이어 홍콩 문제까지 건드렸다. 미국과 중국 모두를 잘 아는 전문가라는 평을 듣는 한석희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중국은 ‘시 주석의 체면을 좀 살려주면 타협할 수 있다’는 게 속내인데 트럼프는 ‘무릎 꿇고 백기를 들지 않는 한 계속 간다’고 밀어붙이는 형국”이라고 했다. 중국이 미국이라는 최대 시장을 잃는 것은 큰 타격이다. 더 두려운 것은 화웨이 등 중국의 대표 기업에 대한 기술 이전을 막아 글로벌가치사슬(GVC)에서 배제하려는 움직임이다. 중국이 기술 굴기를 호언장담하고 있지만, 원천기술은 태부족인 게 현실이다. 주한 중국대사관 관계자도 스마트폰을 제조하는 데 10개의 기술이 핵심이라면 중국은 아직 2개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라고 할 정도다. 미국의 지적재산권을 사용할 수 없을 경우 기술 격차를 메우기 쉽지 않을 것이다.

무역전쟁이 장기화하면 중국 공산당 통치와 정당성의 기반인 경제 성장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는 시나리오도 끔찍하다. 중국 인민들이 당분간은 미국에 대한 적대감으로 뭉치겠지만 경제난이 지속하면 불만이 공산당 일당체제로 향할 수 있다. 무역전쟁에 대응하느라 국영기업 부채와 ‘그림자 금융’ 등 중국 경제 고질들의 수술이 미뤄지는 것도 문제다. 이는 향후 위기를 더 키울 수 있다.

이처럼 중국이 궁지에 몰린 것은 시 주석 등 지도층의 오만과 오판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은 미국을 얕잡아봤다. 중국이 이제 미국도 별 것 아니다, 맞설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게 중론이다. 직격탄을 맞은 미국 정부가 위기 해결을 위해 중국의 적극적 역할을 요청하자 중국 지도층은 미국의 세기는 끝났다고 인식했다. 그러나 미국 경제는 무서운 복원력을 보였다. 미국이 다자 통상체제와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라는 2차대전 후 자신들이 구축한 시스템을 스스로 파기하지 않을 것이란 오판도 작용했다. 중국은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당시 약속한 시장 지향적인 체제로의 이행을 2006년쯤부터 사실상 중단했다. 그런데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세게 채찍을 휘두르지 못했다. 중국 지도층은 더욱 대담해졌다.

트럼프가 등장하면서 중국의 셈법은 틀어졌다. 중국은 결국 트럼프도 투이불파(鬪而不破·싸우되 판을 깨뜨리진 않는다)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판을 바꿔버렸다.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에 따르면 “트럼프는 다자 무역체제라는 고속도로에서 탈법을 일삼는 중국을 단속하기 위해 더 많은 경찰과 순찰차를 투입하기보다 자신과 생각을 같이하는 국가들에만 진입을 허용하는 새로운 고속도로를 내려고 한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당혹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중국은 특유의 장기적 관점으로 대응하려고 한다.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하더라도 5~6년만 견디면 된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는 희망사항에 그칠 공산이 높다. 중국을 이대로 둘 수 없다는 데 대해선 공화당과 민주당의 차이가 없다. 그 의지도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한국의 대중 정책은 이러한 현실에 바탕을 둬야 한다. 중국이 WTO 체제라는 다자 통상질서의 최대 수혜자이면서도 규칙과 규범을 지키지 않아 화를 불렀고, 공존공영을 내세우면서도 이웃 국가에 대해 위협과 압박을 거침없이 하는 이중적 강대국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무엇보다 판이 바뀌었다는 걸 직시해야 한다. 게임의 판과 규칙이 바뀐 마당에 미·중 간 등거리 외교나 전략적 모호성, 사례별(case by case) 대응 등이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다. 정부와 국민 모두 선택이 불가피하며, 여기엔 비용이 따른다는 걸 받아들이는 게 문제 해결의 시작일 것이다.

배병우 논설위원 bwb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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