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를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피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한 유엔 보고서가 나왔다. 빈 살만 왕세자가 카슈끄지 살해를 막후 조종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그동안 많았지만 유엔 차원에서 공식 발표가 나온 것은 처음이다. 사우디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카슈끄지 살해 논란이 사건 8개월 만에 다시 불거질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동안 국제사회의 비난을 무릅쓰며 빈 살만 왕세자를 감싸던 미국도 난감한 처지에 놓였다.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에 따르면 아녜스 칼라마르 유엔 초법적 사형 관련 특별보고관은 19일(현지시간) 보고서에서 “카슈끄지 피살과 관련해 수집된 증거를 미뤄볼 때 정부 차원의 개입과 자금 지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빈 살만 왕세자가 알지 못한 채 이런 공작이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칼라마르 보고관은 빈 살만 왕세자의 범죄 혐의를 확증하는 ‘스모킹건’은 찾지 못했지만 그가 핵심 역할을 했다고 판단할 만한 증거는 확보했다고 밝혔다.

카슈끄지는 워싱턴포스트(WP) 칼럼니스트로서 사우디 정권을 비판하는 기고문을 내온 반체제 인사였다. 그는 지난해 10월 이혼 관련 서류를 떼러 터키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총영사관을 방문했다가 실종됐다. 이 사건을 수사한 터키 경찰은 미리 총영사관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우디 요원 15명이 카슈끄지를 살해했다고 결론지었다. 사우디 정부는 자신들의 개입 사실을 부인해오다 피살에 직접 관여한 요원과 군부 고위인사를 재판에 넘기는 선에서 봉합했다.

보고서는 사건 전후의 상황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카슈끄지가 총영사관에 도착하기 직전 사우디 정부 소속 법의학자 살라 무함마드 알투바이지는 사체 훼손이 “쉬운 일”이라며 “관절들은 잘 잘라질 것이다.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카슈끄지를 살해한 후 증거인멸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의심되는 대목이다. 수분 뒤 사우디 정보요원이 카슈끄지를 ‘희생제물(sacrificial animal)’이라고 지칭하며 그가 총영사관에 도착했는지 묻기도 했다.

범정부 차원에서 범행을 조율한 정황도 포착됐다. 무함마드 알오타이비 총영사는 사건 수일 전 ‘1급 비밀 작전’ 명목으로 영사관 직원 2명에게 리야드 출장을 지시했다. 출장 목적을 휴가로 위장하기 위해 알오타이비 총영사는 두 직원의 가족들도 항공권을 구매토록 했다. 알오타이비 총영사는 카슈끄지 암살 임무를 띠고 이스탄불에 온 요원들에게 바다 전망 호텔 객실을 숙소로 제공했다. 요원들의 이스탄불 방문 목적을 여행으로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증거를 철저히 인멸하기 위해 과학수사 전문가가 투입된 사실도 확인됐다.

칼라마르 보고관은 유엔은 물론 미 연방수사국(FBI)도 추가 수사를 벌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카슈끄지가 미국 영주권자 신분이라는 이유에서다. 아울러 빈 살만 왕세자의 자산을 동결하는 등 제재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밝혔다. 아델 알주베이르 사우디 외교장관은 보고서 내용에 대해 “새로운 게 없다”며 “그동안 언론에 나왔던 내용을 재탕한 것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빈 살만 왕세자는 오는 26~27일 한국을 방문해 문재인 대통령과 회담할 예정이다. 빈 살만 왕세자가 방한하는 것은 처음이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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