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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시평-민세진] 레드 테이프를 끊자


지인이 오랜 아파트 생활을 접고 서울 근교 주택으로 이사했다. 오래된 주택이라 수리하면서 보니 대문 옆 도로명주소판도 너무 낡았더란다. 2014년 도로명주소가 전면 시행되면서 지방자치단체에서 무료로 나눠준 주소판이었다. 예전 동사무소에 해당하는 주민센터에 물어보니 집주인이 직접 교체해야 한다며 제작하는 회사 몇 군데를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중 한 회사에 인터넷으로 주문하여 새 주소판을 달았다. 그런데 며칠 후 어떤 사람이 주소판을 보면서 뭘 적고 있었다고 한다. 무슨 일이냐 물었더니 구청에서 나온 공무원인데 주소판이 오각형이어야 하는데 사각형이어서 규격에 맞지 않으니 교체해야 한다고 하더란다. 주민센터에서 알려준 회사에서 주문해 바꿨는데 무슨 소리냐 하니까 자기는 그런 건 모르겠고 여하튼 규격에 맞지 않으니 바꿔야 한다는 말만 반복했다고 한다.

각자의 경험에 따라 문제점이라 생각하는 부분이 다를 수 있겠지만 이 집주인이 매우 짜증이 났으리라는 것은 공감될 것 같다. 도대체 어디서 잘못됐을까. 가장 쉬운 용의자는 주민센터다. 애초에 규격을 제대로 알려줬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청 공무원의 잘못도 사소하지 않다. 불편을 끼쳐 유감이며 해당 주민센터에 확인해보고 규격에 대한 안내가 제대로 되도록 조처하겠다고만 했어도 집주인의 화가 상당히 누그러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 집주인이 규격이 다른 주소판을 주문한 것을 보면 규격이 한 가지가 아니라는 점이 짐작된다. 그렇다면 규격은 누가 정하는 것이며 우리는 오각형이든 사각형이든 원하는 모양을 선택할 권리도 없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게다가 주소판을 달지 않은 것도 아닌데 이런 일에 행정인력이 쓰여야 하는지 세금이 아까운 생각도 든다.

행정안전부가 도로명주소법에 의거하여 정한 도로명주소 안내시설 규칙에 따르면 주택 같은 건물에 붙이는 주소판을 건물번호판이라 부르고 이 번호판의 구조, 규격, 글씨체에 색깔까지 정해져 있다. 흔히 보이는 흰 테두리에 파란 오각형의 건물번호판이 그것이다. 하지만 시장, 군수, 자치구청장 같은 자치단체장이 도로명주소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디자인을 바꾸면 해당 지역에서는 다른 건물번호판을 쓸 수 있기 때문에 한 가지 종류가 아닌 것이다. 서울 강남구, 서초구나 경기도 용인시, 전남 순천시, 경남 함양군 등은 다른 모양이나 색깔, 글씨체를 사용하고 있다. 만약 독창적인 번호판을 달고 싶다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만 별도 서식에 크기, 모양, 재질, 부착 위치 등을 표기한 도면을 첨부하여 해당 자치단체장한테 신청하고 검토를 받아야 한다. 웬만한 사람이 감수할 수고는 아니다.

관료제의 폐해를 상징하는 표현 중에 레드 테이프(red tape)가 있다. 공식적인 규정과 절차를 글자 그대로 따를 것을 강제하는 시스템의 비효율을 의미한다. 과도한 서류, 인허가, 의사결정 절차 등을 포괄하는 표현이다. 흥미로운 것은 원래 레드 테이프가 16세기 초 거대한 제국을 다스렸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로스 5세 때 제국 곳곳에서 도착한 서류 중 시급한 논의가 필요한 것을 묶어서 구분하려고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레드 테이프는 행정 절차의 효율성을 높이는 발상이었다. 그것이 어쩌다 반대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라가 발전하고 제도가 성숙하면서 불필요하거나 과도한 규정, 규제도 쌓여가는 것이 불만을 넘어 걱정스럽다. 내 집 주소판마저 개성껏 못 붙이는 나라가 된 것이다.

경기가 심상치 않아 정부에서 6.7조원 추경을 편성한다고 한다. 왜 매년 추경이냐는 지적이 있는 한편 이 정도 규모로 어림없다는 불만도 있지만, 안 하자니 불안하고 하자니 어떻게 돈을 풀어야 할지 확신이 없어 그런 것 아닌가 싶다. 정부가 하는 일은 크게 세금 걷고, 쓰고, 규제하는 것이다. 걷고 쓰는 데 묘수가 없으면, 생색이 나지 않고 숫자로 쉽게 드러나지 않더라도 규제를 풀어야 하는 것이다. 레드 테이프가 참 질기기도 하다.

민세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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