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주선애 (13) 피난중에도 찬송… 기독교인 삶은 달랐다

목회 중인 부산에 피난민들 몰려와… 식량 떨어지고 전사 소식 들려와도 찬송 부르며 기도로 아픔 견뎌내

1950년 5월 26일 서울 남산의 장로회신학교 제3회 졸업식 모습.

부산 변두리에 자그마한 목조 건물로 건축된 부전교회엔 교인 100여명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 교회를 이끄셨던 김형식 전도사님의 설교는 정말 뜨거웠다. 교인들은 젊은 전도사를 잘 따랐고 새벽기도는 물론 밤기도와 철야기도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백남조 집사님께서는 서울에서 오는 나를 위해 흙벽돌로 방 한 칸, 부엌 한 칸을 자기 집 마당에 지어주셨다. 내겐 오랜만에 독립적인 주거 생활을 할 수 있게 해 준 특별한 선물이었다.


(포털사이트에서 영상이 노출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정부를 수립한 지 3년도 안 돼 남침을 감행했다. 북한의 꿈은 혁명뿐이었다. 남한은 군인이나 무기가 채 준비되지 않았지만, 김일성은 소련과 의논해 남한을 공산화하기로 결단을 내린 상태였다. 갑작스러운 전쟁에 남한은 꼼짝 못 하고 당해야 했고 전쟁이 계속되자 피난민들은 부산으로 밀려들었다. 평양과 서울에서 내려오는 사람들 중에 조금이라도 나를 아는 사람들은 우리 집을 찾았다. 단칸방 뜰에는 피난 보따리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부상당한 군인들은 학교에 마련된 의무실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도울 사람이 모자랐다. 나는 임시 육군병원에 심방을 다녔다. 곳곳에서 열리는 나라를 위한 기도회에 교인들과 함께 참석했다. 피난민들은 대부분 학교나 교회 건물에 모여 살았고 마당에 불을 피워 밥을 짓는 형편이었다.

부산은 점점 난민촌으로 변했다. 그 속에서도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보통사람과 달랐다. 피난생활 중이었지만 여기저기서 찬송 소리가 들렸고 밤이면 천막교회 안에서 철야기도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비록 식량이 떨어지고 물이 없어 물지게를 지고 멀리 다닐지라도 불평은 거의 없었다. 수많은 전사자들의 소식이 들려오면서 비보를 들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왔다. 기도로 아픔을 견뎌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환난이 소망을 낳는다는 것을 또 한 번 깨달았다.

부산 거리엔 슬픔에 가득 찬 피난민들의 탄식소리가 높았지만 전쟁 통에도 크리스마스는 다가왔다. 교회마다 단출하지만 반짝이는 장식이 걸렸고 아이들은 모여서 밤샘을 하며 새벽송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의미를 아는 교인들은 마구간 같은 곳에 머물고 있는 자신들의 삶을 통해 성탄을 마음에 기리고 감사함을 느꼈다. 피난살이가 어렵고 고생스러웠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우리 소망과 생명 되신 주님의 탄생이 더 없이 피부로 와 닿았을 것이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교인들과 밤새 찬양을 부르며 예수님의 탄생을 선포하러 다녔다. 아직 부산 지리가 익숙지 않아 교인들을 따라다니며 찬양에 목소리를 더할 뿐이었지만 밤새 피곤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행복했다. 흰 눈이 온 세상을 덮었는데 어느 뚝방 같은 곳에 올라서서 보니 흰 눈이 내린 ‘콘셋(반원형) 막사’ 수십 개가 큰 벌판에 흩어져 있었다. 뚝방에 올라선 채로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부르자 갑자기 막사에서 군인들이 뛰쳐나왔다.

“할렐루야.” 군인들이 눈 위에 꿇어앉아 두 손을 움켜쥐고 기도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찬송을 부르는 교인들의 목소리가 떨렸다. 난 눈을 감고 기도했다. ‘하나님. 얼마나 자유가 그리운 자들인지요. 찬송을 부르고 싶어 얼마나 속이 탔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릴 구원하신 것처럼 저들에게 자유를 주옵소서.’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