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4일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은 장교클럽 낙성 기념 파티에서 술을 마시고 2차로 명동에 진출해 25일 새벽 2시 귀가했다. 4시20분쯤 춘천지구 6사단 7연대장으로부터 화천 방면 전면 침공과 포격 보고를 받았다. 흔한 충돌이려니 생각했다고 한다.

오전 7시 다된 시각 서울중앙방송국(KBS 전신) 스튜디오. 위진록 당직 아나운서가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의 확인을 거친 임시뉴스를 읽었다. ‘임시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새벽 북한 공산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전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우리 국군이 건재합니다. 거듭 말씀드리겠습니다….’

28일 서울은 인민군에 점령됐다. 위진록이 서울 교동초등학교 인근에 사는 어머니가 걱정돼 걸어서 찾아가다 화신백화점(종로타워빌딩 자리) 앞에서 몇 구의 국군 시체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어린 병사들인데 관자놀이에 동전만 한 핏자국이 있었고 한쪽 얼굴이 없어진 채였다. 그는 민족의 비극이 시작됐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국회의원 송방용은 한강다리가 끊어지기 전에 영등포로 가자는 동료 의원의 권유로 피난을 준비하다 28일 오전 2시30분 국군의 다리 폭파로 고립됐다. 이시영 부통령이 한강 인도교를 넘자마자 폭파해 버린 것이다. 그는 어렵게 한강을 건넜다. 대전에 도착하니 충남도청에서 국회가 열렸다. 신분증을 놓고 온 그는 순경의 제지를 받았으나 조봉암 의원의 보증으로 출석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서울을 몰래 버렸듯, 곧 대전도 버렸다. 송방용은 지역구 김제를 향해 피난민이 돼 화물열차를 탔다. 전쟁고아들이 자신의 손에 든 찐감자에서 눈을 떼지 않자 그들에게 주었다. 정치인으로 많은 것을 자책했다. 익산 즈음에서 최윤호 최병주 의원을 만났다. “이제 가면 죽어 올지 살아 올지 모르니 부모님 뵙고 동행하자”고 했던 두 의원은 각기 피살, 납북됐다. 송방용은 배재학교, 연희대학에서 각기 아펜젤러 2세와 한글학자 정인보 선생에게 교육받은 신앙인이었다. 죽는 날까지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헌신했다.

지난 25일 아침. 일본 고후교회 홍창희 목사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아들 요한군이 군에서 휴가를 나온다고 기뻐했다. 일본 영주권을 가진 요한군은 군에 가지 않아도 되는데 자진해서 입대했다. 우리 정부가 이런 청년들에게 감사의 뜻을 담아 어디 살든 왕복 항공비용을 준다고 한다. 새삼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정부다.

전정희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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