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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희의 인사이트] 하마터면 일만 할 뻔했다


김광림 시인은 예순 전에 죽으면 요절이고, 예순을 넘어 살면 덤이라고 했다. 김광림 시인이 ‘덤’이라는 이 시를 발표한 1989년 당시에는 평균 수명이 남자 67세, 여자 75.3세였다. 그로부터 30년 뒤인 2017년에는 남자 79.7세, 여자 85.7세로 늘어났으니 요즘은 팔순을 요절과 덤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

114년 만의 첫 여성 은행장으로 화제가 됐던 권선주 기업은행장은 몇 년 전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어차피 은퇴하고 나면 쉬게 되고 그 뒤에 좋은 시간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일할 수 있을 때 충분히 즐긴다는 생각을 갖고 일해 왔다”고 했다. 매일매일 새로운 기분으로 출근하고 모르는 것을 배울 수 있어 35년이란 세월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고도 했다. 2년 반 전 은퇴한 그는 요즘 중국어 공부와 컴퓨터 공부에 푹 빠져 있다.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을 지낸 한 전직 관료는 농촌을 발전시키기 위한 전문가 모임을 만들어 농촌을 돌며 젊은이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한탄처럼 눈이 침침해 공문서를 읽지 못하고 허리가 굽어도 명예와 이익을 탐하며 권력 주변을 기웃대는 올드보이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최근 정년연장 논의가 다시 불거지는 것을 보면서 남들과는 다른 인생 2모작을 하는 이들을 떠올리게 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인 노인빈곤율(45.7%)을 낮추고 국민연금 수령 공백기를 메우기 위해 65세 정년연장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한다. 2017년부터 생산가능인구가 줄기 시작하면서 일할 수 있는 연령층을 확보하는 일이 무엇보다 다급해졌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표심을 겨냥한 측면도 없지는 않을 터다.

문제는 기득권층이 직장에서 버티면 버틸수록 청년 일자리가 더 줄어든다는 점이다. 빈부격차가 점점 심해지고 고착화되면서 젊은층이 느끼는 허탈감과 상실감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지난해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던 책 이름이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좁혀지지 않는 격차를 자조하며 대놓고 열심히 살지 않겠다고 선언한 글이다. 특기는 일 거절하기, 모아놓은 돈 까먹기, 한낮에 맥주 마시기! 누가 돈 더 많이 버나 대회, 누가 먼저 내 집 장만하나 대회, 누가 먼저 성공하나 대회…. 그 경주에 참가했는데 지금은 기권한 기분이란다. 헛된 것들로 허기를 채우며 죽을 때까지 일만 하다 가는 한국인의 자화상에 반기를 든 책이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욜로족’(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기보다 현재를 즐기려는 사람들) 등의 신조어가 일자리 기근에 시달리는 청년층의 좌절과 절망을 대변한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20대 남성 지지율이 유독 낮은 것도 최악의 청년실업난과 무관하지 않다.

고령화가 가속화하면서 아버지와 아들이 일자리를 놓고 경쟁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과거에는 한 세대가 은퇴하면 다음 세대가 일자리를 물려받았지만 지금은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일하고, 심지어 아들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 인공지능(AI)으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일자리는 더 줄어들고 있다. 일자리의 종말이 머지않았다. 대형마트에서는 이미 무인 셀프계산대 설치에 반대하는 ‘제2의 러다이트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드는데 노인 빈곤을 해결해야 하고, 청년실업도 풀어야 하니 어떻게 해야 하나. 해법은 선진국처럼 모든 사람이 기초생활이 가능하도록 사회안전망을 촘촘히 구축하는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었다고 하지만 한국의 사회복지 수준은 여전히 선진국에 턱없이 못 미친다. 어쩌면 일부 국가에서 실험 단계인 기본소득이,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하는 먼 훗날에는 보편적인 인간의 생계수단이 돼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유희인간’으로 살아갈 수도 있겠다.

10여년 전 미국 채플힐의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로 연수를 갔을 때 부러웠던 것 중 하나는 은퇴한 사람들의 인생 2막 모습이었다. 대학교수를 하다 은퇴한 70대 후반의 노신사는 이국땅에 공부하러 오는 유학생들의 정착을 도와주며 성경공부 모임을 이끌고 있었다. 내가 다니던 또 다른 50대 후반 여성들의 성경공부 모임에서 만난 한 여성은 매년 남편과 함께 아프리카로 자원봉사를 다니곤 했다. 나이 80세까지 산다고 가정했을 때 60세가 넘어가는 인생 2막은 일 중독에서 벗어나 좀 더 사회에 베풀고 의미 있는 삶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도 당장의 정년연장 논의는 신중해야 한다.

이명희 종교국 부국장 mhe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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