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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주선애 (18) “귀국 후 전 세계 복음 전할 선교사 양육” 포부

석사논문 준비 중 남미 선교여행, 잘사는 서양인이 하는 전도보다 비슷한 처지 동양인 말이 더 와닿아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앞줄 왼쪽 두 번째)가 1958년 미국 장로교 에큐메니컬 팀과 함께 과테말라 선교여행에 참여했다.

나의 석사논문은 나를 유학시켜 준 선교부의 요청대로 ‘성경 중심의 기독교대학 교육과정’에 대한 것이었다. 한창 논문을 쓸 때는 식당에 가는 시간도 아까워 우유나 빵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제출할 날짜에 맞춰 끝내기 위해 조급한 마음으로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선교본부에서 전화가 왔다. 에큐메니컬 팀 직원이었다. 그는 과테말라와 멕시코에 한 달간 단기여행을 가도록 준비하면 좋겠다고 했다. 논문 제출일은 선교부에서 학교에 얘기해 연기 신청을 해줄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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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1월 뉴욕 비행장에는 눈이 하얗게 내려 있었다. 우리 팀은 인도에서 사역하던 여선교사와 레바논 여성 지도자, 필리핀 여변호사를 포함해 네 명이었다.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은 모두 영어권에 살고 50세가 넘은 분들이었다.

무척 긴장되면서도 감사했다. 10년 전만 해도 공산당을 피해 38선을 넘던 내가 남미까지 선교를 가게 된다니 꿈만 같았다. 과테말라에 도착하니 완전 여름 날씨였다. 화려한 꽃들이 우리를 반겨줬다. 공항에 환영 나온 여성들이 우리 팀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안아주며 그 나라 말로 인사했다.

과테말라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버스 운전기사도 콧노래를 부르며 운전하고 상점에 들어가도 점원들이 흔들흔들 노래를 불렀다. 우리 팀은 교회 모임에 가서 각자의 나라와 교회를 소개하고 간단한 메시지를 전했다. 교회에선 외국 손님들을 환영하는 의미로 입구에서부터 강대상까지 솔잎을 가득 깔아 놓아 은은한 향기가 예배당에 가득했다. 나는 복음이 이들의 가난한 영혼을 채워 주시기를 기도했다.

한 기독교학교도 방문했는데 환영하는 의미로 우리 팀원들이 속한 국가의 국기를 강단에 붙여 놓았다. 미국 레바논 필리핀. 그런데 우리나라는 태극기 대신 북한 인공기가 걸려 있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부끄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1958년 당시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68달러였다. ‘국력이 약하면 타국에서 이토록 업신여김을 당하는구나.’ 혼자 탄식할 뿐이었다.

우리 팀이 이 조그마한 나라에서 하나의 뉴스거리가 된 모양이었다. 가는 곳마다 갑자기 마이크를 들이대는 바람에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나는 38선을 넘어온 피난민이며 지금도 한국전쟁으로 우리 국민들이 고통당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위로받으며 살고 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우리 팀은 대체로 자기 나라의 아름다움과 특징 등을 소개하기 바빴다. 그런데 과테말라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와 닮아있는 가난한 한국 이야기가 더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나를 “세뇨리따, 코리아나, 한국 여성”이라고 부르며 더 많이 찾았다.

그들 중 한 지도자급 인사는 내게 “선교사들은 대개 서양 사람들인데 서양 사람들이 하는 전도보다 동양 사람이 하는 게 더 알아듣기 쉽고 마음에 와닿는다. 당신이 여기 선교사가 되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말 고생이 무엇인지 잘 아는 사람이 십자가의 도리를 전해줘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이 복음을 세계에 전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하시려고 남다른 고통을 겪도록 하셨구나.’

나는 하나님의 뜻을 물으면서 나를 선교사로 부르시는 게 아닌지 잠시 기도해 봤다. 그리고 그 지도자에게 대답했다. “고국에 돌아가 선교사를 양육하는 일이 제 사명인 듯합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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