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주선애 (19) 험난한 기독교교육과 여성교육… 두 마리 토끼 다잡아

한국선 생소한 기독교교육학 정체성과 교육의 가치 홍보에 힘써… 여학생 모집 위해 등록금 절반만 받아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앞 줄 왼쪽 세 번째)가 1961년 숭실대 기독교교육학과 학생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뉴욕성서신학교를 졸업한 나는 1958년 8월 귀국길에 올랐다. 미국에 갈 때는 배로 갔지만 돌아올 때는 선교부에서 항공권을 마련해줘 비행기를 타고 왔다. 여의도비행장에 내렸는데 당시만 해도 여의도는 정말 시골이었다. 비행장엔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드리운 어머니께서 마중을 나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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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나를 우리나라 기독교교육학과의 기초를 닦은 인물로 소개하곤 한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한국에 없던 기독교교육학과를 혼자 개척하고 기반을 놓으려 했는지 놀랍기만 하다. 미국에서 겨우 2년 공부하고 와서는 큰일들을 자진해서 하겠다고 나선 내가 지나친 만용을 부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열심을 다하는 내 모습을 보던 김성락 숭실대 학장님은 “산골 개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우선 미국에서 가져온 기독교교육학과 소개 책자들을 참조해 4년간 이수해야 할 과목들을 짜봤다. 당시 이화여대에 기독교학과가 있었고 연세대 대학원에 기독교 과목이 있을 뿐, 기독교교육학과는 어디에도 없었다. 사람들은 기독교교육학과가 무엇을 가르치는 학과인지 물었다. “주일학교 선생 하는 것이냐”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교회학교 선생님들부터 교육하면서 기독교교육학과의 정체성을 알리고 얼마나 필요한 교육인지를 가르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름방학 때 여름성경학교 교사강습회를 하기로 했다. 숭실대 기독교교육학과 주최로 시행한 강습회엔 해가 갈수록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강습회가 연례행사로 자리 잡으면서 일반 교회에 기독교교육에 관한 관심이 확산됐다. 학생들 중에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반 대학을 다시 다니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도 꽤 됐다. 나이도 30대 중반이어서 나와 별 차이가 없었다. 젊은 여교수에게 수업을 들어본 경험이 없었던 학생들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개척자가 가는 길은 어디나 험하다고 했던가. 기독교교육학과엔 강의를 부탁할 다른 강사도 없었다. 다른 학과장들에게는 강사를 하게 해달라고 소고기를 사 들고 온다는데 나한테는 아무도 찾아오질 않았다. 오히려 다음 학기 강좌를 맡기기 위해 다른 학교로 품앗이를 하러 가야 했다. 여자 비율이 현저하게 낮은 건 교수뿐 아니라 학생도 마찬가지였다. 더 많은 여학생을 모집하기 위해 여학생에게는 등록금을 절반만 받기로 했다. 몇 명 되지 않던 여학생들은 수줍어서 자기들끼리 뭉쳐 다니곤 했다.

1960년 4 19의거가 일어났다. 학생들은 강의를 거부하고 시내 거리로 뛰쳐나갔다. 여학생들이 내 연구실로 들어와 물었다. “선생님, 우리는 어떻게 해요. 데모에 나갈까요, 말까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등록금을 반만 냈다고 반쪽짜리 학생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대한민국의 대학생입니다. 스스로 의견을 결정할 권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내게 여성교육은 기독교교육 못지않게 중요한 과제였다. 1963년 장로회신학대에서 여전도사 교육을 위한 강사로 서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총회에서 특별 위탁이 왔는데 교수가 없으니 초급 대학과정으로 여전도사 교육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교역자 키우는 일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장로회신학대와 숭실대를 오가며 강의하면서 여전도사 교육을 위한 교육과정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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