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기독 학교·병원 하나돼 광주서 첫 ‘독립만세’를 외치다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2부> 독립운동과 한국교회 (22) 광주 3·10 만세운동

광주 수피아여학교의 후신인 수피아여자고등학교에 세워진 ‘광주3·1만세운동기념동상’. 만세를 부르다 옥고를 치른 박애순 진신애 교사와 홍순남 박영자 등 학생 21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아! 우리 동포들아 눈을 들어 세계의 대세를 보라.… 기회는 두 번 오지 아니하니 이때를 맞이하여 맹렬히 일어나 멸망의 길로부터 자유의 낙원으로 뛰어나가라.”

1919년 3월 10일 오후 3시, 광주 부동교(不動橋) 밑 작은 장터에 모인 1000여명에게 배포된 격문 내용 중 일부다. 양림리와 북문, 지산면 세 갈래 방향에서 모여든 인파는 이 격문을 받아들고 미리 준비해 온 태극기를 꺼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태극기를 준비하지 못한 이들은 모자나 두 손을 높이 들어 만세를 불렀다. 쌀 장수는 쌀되를, 그릇 장수는 그릇을 두드리며 행렬에 합세했다.

광주 지역 첫 3·1운동으로 기록된 3·10만세운동의 한 장면이다. 학생 농민 기독교인 천도교인 등 각계각층이 조직적으로 동참한 만세 시위가 3시간 가까이 이어지자 일제는 강제진압에 나섰다. 100여명이 체포되고 유혈 사태까지 빚어졌으나 만세운동은 그해 4월 말까지 장성 임곡 본량 등에서 이어졌다.

광주 지역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된 이 거사는 미션스쿨인 수피아여학교와 숭일학교, 북문안교회, 광주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 등 ‘기독교 연합 세력’이 주도했다. 거사의 태동은 그해 2월 일본 유학생으로 2·8독립선언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김마리아가 광주 양림리에 살던 언니 김함라에게 ‘조선청년독립단 선언서’를 전달하면서 시작됐다. 김함라는 그해 3월 6일 북문안교회 장로인 남편 남궁혁과 논의해 자신의 집으로 교회 성도와 비밀 독서회 회원을 불러모아 만세운동을 모의했다. 여기서 숭일학교 최병준 손인식 송흥진 교사는 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들은 거사일을 10일로 정하고 학생 및 청년들과 함께 선언서, 격문 등 인쇄물과 태극기 등을 준비했다. 박애순 등 수피아여학교 교사들은 학생들과 함께 자정이 넘은 시각 기숙사에서 고종 인산일에 입었던 흰 치마를 잘라 대형 태극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1919년 3·10 만세운동 직전 수피아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었던 기숙사 ‘수피아홀’ 전경.

이 양림리 회동엔 거사의 주모자인 김철(본명 김복현)도 참여했다. 북문안교회 집사인 김철은 그해 2월부터 같은 교회 장로인 최흥종과 서울서 내려온 김필수 목사와 교류하며 만세운동을 공모하던 중이었다. 최흥종이 서울 종로의 3·1운동에 참여했다가 검거돼 김철은 홀로 거사에 합류한다.

거사 당일 교회와 학교, 지역 청년들로 구성된 1000여명의 시위대가 행렬을 이뤄 만세를 부르자 일제는 이들을 해산하기 위해 먼저 지도부를 체포한다. 그런데도 만세 행렬이 무너지지 않자 총검을 휘둘렀다. 이때 수피아여학교 학생 윤형숙의 왼쪽 팔이 잘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윤형숙은 이에 굴하지 않고 남은 팔로 태극기를 들어 끝까지 만세를 불렀다. 이에 분노한 군중은 거세게 ‘조선독립만세’를 불렀고 당황한 일경은 이튿날 오전 1시 5분에 육군성으로 다음과 같은 긴급전문을 보낸다. ‘광주에서 야소교가 주동한 군중폭동이 일어났으며 이 중 조선인 1명이 부상.’ 여기 언급된 부상 당한 조선인이 윤형숙이다. 북문안교회 성도였던 그는 이 일로 4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첫 거사로 만세운동 주모자 대다수가 체포돼 구심점이 약화되자 광주제중원 소속 황상호(회계원) 홍덕주(간호사) 장호조(약제사)는 ‘조선독립광주신문’ 제1호를 거사 이튿날인 11일 발간한다. 광주 사람들의 민족의식을 계몽하고 향후 만세운동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병원 등사기를 활용해 펴낸 신문에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 등 해외 현안과 광주 3·10 만세운동을 소개하는 내용이 담겼다. 300부가 제작된 제1호의 2면에선 ‘조선의 봄은 이미 왔으니 우리들은 약한 자를 강하게 하고 가난한 자를 부하게 한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목적을 향해 나갈 뿐이다’란 내용을 실어 기독교인으로서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이유를 밝혔다.

조선독립광주신문은 광주의 만세운동 분위기를 고조시켰으나 주모자 3인의 체포로 4호까지만 발간됐다. 하지만 신문이 목포와 영암 등지로 유입되면서 인근 지역의 만세운동을 촉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송인동 호남신학대 교수가 지난달 20일 광주 남구의 광주양림교회 앞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가 기증한 ‘1919년 3·1운동 참여교회’ 동판을 들고 있다.

송인동 호남신학대 교양학과 교수는 “교회와 학교, 병원과 지역 주민들이 함께 일궈낸 광주 만세운동은 훗날 다른 지역 조직적 거사의 모본이 됐다”고 말했다.

광주=글·사진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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