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주선애 (20) 35세에 여전도회 회장 맡아… 시대 이끌 사명

복음주의와 교회일치운동의 분열… 여성들이 주관해 화합기도회 열고 선도적으로 평화유지 해주길 호소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앞 줄 왼쪽 네 번째)가 1959년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임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미국 장로교 선교부 장학생 신분으로 장로교 여성대회인 풀듀대회에 참석할 기회를 얻었다. 여성 대표들이 전국적으로 5000여명이 모여 향후 3년간 활동 방향을 결정하는 중대한 회의였다. 한국 여전도회에선 정신여학교 교장선생님이신 김필례 회장께서 17대부터 20대까지 여전도회 전국연합회를 이끌어 오셨다. 미국 선교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선생님과 풀듀대회에 동행했다. 이 대회 참석은 내게 한국 여성운동의 방향성을 깊이 고민하게 해 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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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돌아와 풀듀대회 체험담을 여전도회 전국연합회에 보고하기로 한 날 상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내가 절대 다수의 표를 받아 여전도회 회장으로 피택된 것이다. 나는 두려움에 떨며 사양했다. “전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제가 회장직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35세에 회장이 된 것이다. 임원들은 모두 50대 이상이었다. 어머니 같았던 임원들은 나를 무척 아껴주셨고 신앙의 동역자인 젊은 내 친구 이필숙 전도사를 총무로 택해 주셨다. 김 회장께서 여전도회를 젊은이에게 맡겨 시대를 이끌어 가도록 한다는 의도를 갖고 모험을 하신 것이었다.

1959년 9월 44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대전중앙교회에서 열렸다.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총회장은 총회보고를 위해 총무와 함께 참석하게 돼 있었다. 개회예배가 끝나고 회원 점명을 하는데 누군가가 회장을 부르더니 언성이 높아지면서 싸움이 벌어졌다. 부끄럽게도 몸싸움으로 확대됐다. 결국 총회는 휴회되고 말았다.

이것이 소위 복음주의운동(NAE)과 교회일치운동(Ecumenical Movement)의 분열이었다. 너무 떨리고 무서워 총무와 나는 눈물을 흘리며 돌아왔다. 이후 교회일치운동 측은 서울 연동교회에, 복음주의운동 측은 승동교회에 각각 모였는데 우리는 어디에도 갈 수가 없었다. “하나님, 어쩌면 좋은가요”라며 부르짖을 뿐이었다. 여전도회 회원들에게 앞으로 닥칠 분쟁과 분열을 상상하니 기가 막혔다.

‘나 개인은 박형룡 박사님의 복음주의 신앙에서 벗어날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내게 미국 유학을 할 수 있도록 한 건 에큐메니컬 교단이다. 이를 어쩌지.’

어느 편으로도 갈 수가 없었다. 나와 총무는 김 회장님 댁을 찾아갔다. 회장님은 차분하게 한참 생각하시더니 말씀하셨다.

“우선 갈라지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수년 전 기독교장로회와 예수교장로회가 분쟁할 때 여성들이 끼어들어 분위기가 더 흉악해졌지요.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안 됩니다.”

쌍방이 다시 교회 화평위원회를 조직해 분열을 막자며 노력했다. 여기에 찬성하는 교회 청장년연합회 회장 황성수 박사와 주일학교연합회 고응진 장로,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세 단체가 “총회 분열을 원치 않는다”고 외치며 성명을 냈다.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임원들은 ‘평화 합동을 위한 기도회’를 열기로 하고 전국 회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서울 시내 큰 교회를 돌며 기도회를 주관하고 여성들이 선도적으로 평화를 유지해주길 호소했다. 기도는 점점 뜨거워졌고 호응은 확대됐다. 용기를 얻어 분열에 반대하는 목사님들을 개별적으로 방문하기 시작했다. 어떤 목사님들은 여전도회 사무실로 전화해 엄포를 놨다.

“여전도회가 제3의 세력을 만드는 것인가. 주선애 회장은 박형룡 목사를 배신하는가”라고 소릴 지르며 여전도회를 공격했다. 둘 사이에서 중보를 한다는 건 어느 한쪽을 지지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는 걸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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