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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문수정] 트렌드 최전선에서 ‘여자답게’


여느 초등학생들처럼 아이는 수수께끼를 좋아한다. 느닷없이 이게 뭔지 맞혀보라며 야무지게 쥔 손을 들이밀기 일쑤다. 보기도 없고 힌트도 없다. 어쩌란 말인가. 하지만 답은 예측 가능하다. 평소의 관심사, 최근에 받은 선물, 주말에 본 만화와 맥락을 이룬다. 이 게임에서 보일 만한 태도는 두 가지다. 초조해하거나 여유를 부리거나. 짐짓 느긋한 태도로 “파키케팔로사우르스?” 했을 때 아이의 얼굴에 낭패가 스치면, 게임은 시시하게 끝난다. 실망감을 감지하고 엉뚱한 이름을 댔을 때, 아이는 기뻐한다. 맞히는 자의 태도에 따라 승패를 오갈 수 있는 승부다.

게임을 하나 하고자 한다. 지금부터 사례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막연히 떠올려보시라. 그리고 성별을 맞혀보면 된다. 답을 알고 나면 좀 시시할 수 있겠다. 아이의 경우와는 반대로, 부디 많이 맞히시기를 바란다.

A는 얼리어답터다. 핫한 아이템을 가장 먼저 사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기도 마다치 않는다. 최근 경기도의 오래된 신도시에 낡은 집을 장만한 A는 인테리어를 하면서 신세계를 맞았다. 의류건조기, 의류관리기, 식기세척기, 로봇청소기, 에어프라이어, 디자인 냉장고, 커피머신 등등. A는 “일상의 혁명이 여기에 있었다”고 말했다. B는 근육을 만드는 데 빠져있다. 우연히 6개월에 20만원짜리 헬스클럽을 끊은 게 시작이었다. 각종 근육 운동 기구를 섭렵하다 보니 탄탄한 허벅지, 팔뚝의 잔 근육, 희미하게나마 11자 복근을 얻었다. 뒤늦게 재능을 발견한 것 같아 안타까운 지경에 이르렀다. 요즘은 스쿼트, 플랭크 등 코어 운동으로 업그레이드 중이다. B는 “여든이 넘어서도 ‘불금’에 맥주 한 잔을 하는 건강한 몸을 꿈꾼다”고 했다.

C는 주 1회 조기퇴근을 하는 날, 지하철역에서 전동킥보드를 타고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로 달려간다. 시간을 제때 맞추려면 ‘발’ 말고 ‘바퀴’가 필요했다. 학교 앞에 다다르면 방과 후 ‘로봇 만들기’ 수업을 한 D가 커다란 과학상자를 들고 C에게 뛰어온다. E와 F는 자전거를 즐긴다. 요즘 같은 무더위에 강렬한 햇살까지 내리쬐는 날엔 기능성 옷이 필수다. F는 편하고 예쁜 옷을 잘도 찾아 입는다. 햇볕도 가려주고, 소나기를 맞아도 금방 마르고, 맵시도 괜찮다. 편하기까지 하다니 E는 F가 부러울 따름이다. F는 “곧 E도 입을 수 있는 사이즈가 나오지 않을까”라고 되물었다.

써놓고 보니 너무 쉬웠던 것 같다. A는 30대 남, B는 30대 여, C 40대 여, D 8세 여, E 30대 남, F는 20대 여자다. 뜬금포 수수께끼를 건네는 아이도 여자다. A부터 F까지 각자 자신의 모습대로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 한 토막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이 모습이 여자(남자)답지 못해서 낯설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시대의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하는 분야는 소비재를 만들고 판매하는 업계가 아닐까 싶다. 어떤 곳은 민감하게 따라잡아 성공 기류를 타고, 영영 도태되는 곳도 있다. 트렌드의 최전선에서 분투하고 있는 유통·식품·화장품·의류업계가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보면 시대가 보인다.

지금 중요한 흐름 중 하나는 ‘여자답게’라는 표현의 격변이다. 여기에 합류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기업의 미래가 달라질 수도 있다. 수많은 여성들이 오랫동안 으레 그렇다고 여겨져 온 ‘여자답게’를 거부하고 있다. 레깅스를 입고 출근하고, 노와이어 브라를 찾는다. (사례에 나온 F는 남성용 요가복 출시를 원했다.) 여자아이가 로봇을 모으고, 남자아이가 핑크 셔츠를 입는다. 여자든 남자든 안 되는 요리에 에너지를 쏟는 대신, 가정간편식을 보기 좋게 담아내면 된다는 걸 안다.

소비자들이 ‘여자답게’ ‘남자답게’를 거부하고 있다. 갑갑한 틀을 걷어 내고 ‘나다움’을 충족시켜주는 어떤 것을 만났을 때 기꺼이 지갑을 연다. 트렌드의 밑바탕에는 그래서 이런 위기 또는 기회가 도사리고 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여자답게’를 해석하라는.

문수정 산업부 차장 thursda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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