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주선애 (22) 오랜 남존여비 전통에… 여전도사 무용론까지

‘장로교 여성사’ 집필 과정 통해 나라·민족 교회 위해 크게 쓰임 믿어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가 1978년 열린 ‘장로교 여성사 출판기념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여전도사 양성과는 초급대학 같았다. 하나님의 일에 소명을 받은 사람으로서 인격에 결함이 없는 사람들을 선택해 교육하기로 했다. 이들을 가르치면서 우리나라에 여전도사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역할이 본래 무엇이었는지를 조사해 봤다. 오랜 남존여비 전통 아래 여성이 집 밖에서 사람들에게 전도하거나 가르친다는 건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포털사이트에서 영상이 노출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맏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말처럼 딸을 종처럼 여기거나 가난하면 팔아먹을 수 있는 재산 목록의 하나로 취급했던 시대였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여전도사 제도가 생겨났을까.’ 스스로 질문하고 고민했다. 시골에 갈 때마다 연로하신 장로님 목사님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몇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조선시대 말 개화운동에 이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절제운동 기독교교육운동 문맹퇴치운동 같은 사회운동이 일어났을 때 전도운동도 함께 펼쳐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방 이후엔 왜 전도사의 역할이 오히려 축소됐는가.’ 일제강점기가 말기로 오면서 독립운동과 계몽운동 등 여성들의 활발한 사회활동을 일제 총독부가 제재하고 핍박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많은 여전도사들이 산으로 숨거나 가정으로 들어가 버렸고 세월이 흐르면서 그 활발하던 모습들이 사라져 버렸다.

광복 이후 여전도사 제도가 복구됐지만, 활동 분야는 초기에 비해 현저하게 축소됐다. 가정 심방과 목회자를 돕는 일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1980년대 들어서는 여전도사 무용론까지 교회에서 제기됐다.

이런 현상이 발생한 이유를 일본의 정치적 박해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여성들의 자아의식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때 내 동료들만 봐도 일제강점기에 여성은 조용히 집에 있어야 아름답다고 교육받았다. 목회자들이 남존여비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개화기에 가졌던 새로운 사회 건설의 기세를 여성들이 이어가지 못한 탓도 있다. 우리 사회에 선배 여성 지도자들이 없었던 것도 여전도사들의 역할이 축소되는 데 영향을 줬다.

여교역자 양성 문제에 대한 연구는 내게 한국교회여성사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1978년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50주년을 앞두고 임원회에서 ‘장로교 여성사’를 만들어야 하는데 역사학자에게 맡기려 해도 예산이 없으니 ‘주선애 선생이 써보시오’라고 결의해버렸다. 전문가가 아니고 자료도 없고 등 여러 이유를 대며 고사할 수 있었지만 순종했다.

1년 안에 책을 만들어 내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덜컥 받아들고 자료를 찾았지만 거의 찾지 못했다. 결국 생존해 계신 어른들을 찾아다녀야 했다. 돌아가신 김양선 목사님이 소장하셨던 미국 장로교 선교사님들의 보고서 복사본을 양성담 사모님으로부터 받아 연구의 기초로 삼았다. 학교에서는 여전히 대학부 학부장 겸 기독교교육학과장을 맡고 있었다. 교육과 집필을 동시에 소화하는 고난의 길을 걸었다.

결국 1년 만에 하나님의 은혜로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희년 총회에서 ‘장로교 여성사’를 배부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쓰면서 소중한 3가지 진리를 깨달았다.

첫째, 주님의 십자가는 그 고통이 큰 만큼 가치도 지대해 그 대가를 치를 수 없다. 주님은 그 은혜를 무(無)값으로 주셨다. 둘째, 목석처럼 학대받아 온 여성 선배들이 정말 위대한 걸음을 걸어왔다. 셋째,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여성들이 나라와 민족 교회를 위해 크게 쓰임 받을 수 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