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지난 1일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 조치를 발표했다. 요약하면 다음 두 가지다. 첫째, 일본에 대한 수입 의존도가 높은 반도체·디스플레이 생산에 필요한 3개 품목의 수출 규제를 강화하는 것이고 둘째, 한국을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지 않는 ‘화이트 국가’ 지정에서 제외하는 것을 검토해 앞으로 첨단소재 등의 수출 허가 신청 면제 특권을 주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3개 품목은 우리의 대일 수입 의존도가 높은 것이 특징이다. 디스플레이 필름 재료로 사용되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의 일본 수입 의존도는 93.7%(2019년 1~5월 누계 수입액 기준), 반도체 제조 공정에서 노광 공정에서 사용되는 감광액(포토 레지스트)은 91.9%, 반도체 제조 공정 중 식각과 세정에 사용되는 불화수소(에칭가스)는 43.9%나 된다. 불화수소의 경우 중국으로부터 수입액이 더 많지만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의 첨단 메모리 반도체 제조에 사용되는 고순도 불화수소는 대부분 일본 제품에 의존하고 있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우리 기업의 재고분(대부분 2개월 미만)이 다 소진되기까지 일본으로부터 수입이 지체된다면 반도체·디스플레이 생산에 차질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다만, 일본이 실제로 제품 생산에 차질을 줄 만큼 수출을 압박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한국의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는 대체재를 찾을 수 없는 높은 기술 수준을 보유하고 있어 한국의 생산 차질은 스마트폰, 컴퓨터, TV 등 전 세계 ICT 제품의 생산 차질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비관론도, 낙관론도 있지만 필자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우리 소재·장비 산업의 현주소를 되짚어 보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며 세계 시장 점유율(2018년 기준)은 D램 73%, 낸드플래시 46%로 독점에 가까운 시장 지위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소재 및 장비의 국산화율(2017년 기준)은 형편없는 것이 사실이다. 소재 국산화율은 50%를 초과하지만, 장비 국산화율은 18.2%에 불과하다. 이런 현실 때문에 국외발 리스크가 발생할 때마다 핵심 소재·장비의 낮은 국산화율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반복적으로 제기된다.

우리 소재·장비 기술이 늘 제자리걸음만 해온 건 아니다. 제조업 기술 수준 평가(한국과학기술평가원) 보고서를 보면 소재·장비뿐만 아니라 제조업의 핵심 기술 수준은 꾸준히 개선되고 있다. 기계·제조 부문 기술은 2008년엔 세계 최고 기술국보다 6.1년 뒤처졌었으나 2018년에는 3.4년으로 기술격차가 좁혀졌다. 소재·나노 부문도 같은 기간 6.4년에서 3년으로 기술격차를 좁히며 빠르게 추격해 가고 있다. 다만 기술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에 핵심 기술에 대한 해외 의존도가 여전히 높고, 미국 일본 등 제조 기술 선진국과 비교하면 정·산·학 연계가 긴밀하게 작동하지 않는 것이 아쉽다.

그동안 한국 산업 전반이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되기보단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 전략에 의존해 왔다. 그 결과 기술 경쟁력보다 가격 경쟁력이 더 중요한 가치를 가졌고 소재·장비 등 후방산업을 육성하는 데 소홀했던 것이 소재·장비 산업 성장에 걸림돌이 됐을 것이다. 첨단 소재·장비의 낮은 국산화율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협력해 후방산업의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며 기술 노하우 유출 등의 우려가 있어 국산화율을 높이는 게 녹록한 일이 아니다. 정부나 정치권도 반도체 등 소위 잘나가는 산업에 대한 지원은 여론의 비판이 따를 우려가 있어 지원을 등한시했다.

퍼스트 무버인 한국 반도체 산업은 지금 후발주자들의 추격이 두려운 시점이며 기술 초격차 유지를 위해서는 후방산업 육성이 불가피하다. 일본의 조치로 소재·장비 산업의 국산화 필요성에 대한 여론도 형성됐다. 여론과 기업의 니즈가 결합됐다. 소재·장비 산업에 있어 이 같은 천재일우의 기회가 또 있을까.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가 완화되더라도 이번만큼은 소재·장비 산업의 경쟁력 강화에 매진해야 한다. 보여주기식 지원확대보다 미래를 내다보고 꼭 필요한 자금과 규제 완화 조치를 취하길 바란다. 산업계와 학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긴밀한 협력과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장우애 IBK경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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