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파급력이 컸던 일본 제품 불매운동은 물산장려운동이다. 일제강점기에 20년 가까이 한반도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 출발은 평양에서였다. 고당 조만식을 비롯한 민족지도자들이 1920년 8월 경제계 진흥, 실업자 구제와 함께 국산품 애용 등을 실천과제로 내걸고 사회단체를 발족시켰다. 일제의 회사령과 관세 폐지로 조선에 진출한 일본 기업들이 득세하게 되자 민족경제 자립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고당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옥사한 주기철 목사의 오산학교 스승이자 주 목사가 시무하던 평양 산정현교회 장로였다. 당시 운동은 기독교계가 중심이 됐다.

서울에서는 1923년 2월 3000여명의 민족단체 회원이 운동을 시작했다. ‘조선사람 조선으로’ ‘우리 것으로만 살자’가 구호였다. 두루마기와 치마를 조선인이 생산한 옷감에 검정 염색을 해 입었다. 토산품 사용을 원칙으로 하되 외제 일용품 사용이 불가피할 경우에는 절약을 생활화하도록 했다.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됐고 기생과 포주도 동참했다. 토산품 가격이 폭등하는 부작용,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간 분열, 일제의 혹독한 탄압에 밀려 운동은 역사에서 퇴장했다. 하지만 일제강점이 고착화되던 시기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자극제가 됐다.

일본의 핵심 소재 수출 통제가 개시되자 온라인을 통해 시민들의 자발적 불매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일본 기업과 제품 명단이 게시되고 일본 관광 자제를 요구하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중소상인 단체들도 동참을 약속했다. 일본 기업이나 제품으로 오인 받은 곳들은 곤혹스러워하며 해명에 나서는 해프닝도 벌어지고 있다. 중국의 사드 보복 당시 칭따오맥주가 배척받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국민들의 반감이 그만큼 강하다는 방증이다.

도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지인은 가뜩이나 고조돼있는 일본인들의 혐한 분위기가 악화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우리 국민들의 분통터지는 심경은 십분 이해하지만 정치에서 경제로 비화된 양국 갈등이 국민들의 감정다툼으로 심화될까 걱정했다. 일본 정부가 외교적 문제를 무역 갈등으로 확전시킨 데 대해서는 일본 내에서도 비판 목소리가 높다. 우리가 똑같이 과도한 맞대응을 하면 비판여론이 희석되고 오히려 아베 정권에 면죄부를 줄 수 있다. 의연하고 합리적인 대응이 필요해 보인다.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는 건 결국 민심이기 때문이다.

김의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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