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서 박사 한 알의 밀알 되어] 시각장애자용 녹음도서와 ‘밀알보’ 발행

<10> 사역의 본격화

이재서 세계밀알연합 총재(뒷줄 왼쪽 두 번째)가 1981년 2월 제2회 하계수련회에서 단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세계밀알연합 제공

새해 분위기 쇄신을 위해 1980년 1월 22일 화요모임에서는 새로운 임역원을 임명했다. 그리고 각 부의 사업계획과 예산 한계를 정했다. 내가 발표한 사업계획을 보면 2월부터 시각장애자를 위한 신앙 녹음도서 보급 사업을 시작할 것과 2월 내 지방수련회를 개최할 것, 3월부터 매달 ‘밀알보’를 발간하겠다는 것과 각 장애분야별로 전도팀을 구성해 전도활동을 개시한다는 것 등이었다. 돌아보면 이 모든 계획들이 다 그대로 이루어진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밀알의 첫 번째 지방수련회 및 지부 설립을 위한 일정이 많은 준비 끝에 2월 14일 전남 순천 순광교회에서 열렸다. 첫날 낮에는 서울에서 선발대로 내려간 단원과 순천지역 단원들이 함께 소록도를 방문해 환자들을 교제하면서 앞으로 밀알이 해야 할 일들을 다시 한번 가다듬고 다짐하는 시간을 가졌다. 14일 저녁 7시부터는 밤을 꼬박 새우면서 1월 서울에서의 철야기도회에 못지않은 감격과 은혜가 넘치는 시간을 보냈다. 순천지역 단원들의 열정은 뜨거웠고 그 열정이 씨앗이 돼 밀알 최초의 지부가 됐다.

밀알 화요모임의 참석자가 20명이 넘은 것은 2월의 첫 화요모임부터였다. 인원이 점점 늘어나 부별 모임을 가질 수 있는 공간도 부족했고 교통도 불편한 점이 많아 26일 화요모임부터는 용산의 신용산교회 2층 교육관에서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로 신세를 많이 진 연합세계선교회 시절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1983년 열린 ‘심신장애자돕기 자선음악회 밀알의 밤’ 포스터. 세계밀알연합 제공

밀알 창립 후 1년은 밀알의 성격과 사업의 형태를 결정하는 시기였다. 잘 모르는 상태에서 프로그램과 사업을 개발하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밀알의 정신과 개념을 정립하는 기간이었다. 3월은 밀알이 창립된 지 불과 5개월째 되는 시기였지만 분명 한 단계 성숙해 있었다.

그 무렵 한 가지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됐다. 밀알 사역은 운동(movement)이었고 반드시 운동이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운동이 장애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되고 장애인 선교를 효과적으로 이룰 수 있는 방법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운동이란 가치나 정신을 확산해 가는 일이다. 사람들에게 어떤 목적에 부합하는 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다. 운동은 의도하는 어떤 방향을 향해 기존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생각이 있으면서도 생각대로 행하지 않을 때 중요한 가치에 따라 행동하도록 각성시키며 동기를 강화시켜 주는 것이기도 하다.

보수를 받고 보수만큼 일하면서 그 목표가 개인이나 제한된 소수에게 맞춰지는 것은 운동이 아니다. 맡겨진 업무를 일정한 공간 안에서 예정된 일정에 따라 수행해 완수하는 것은 운동이 아니다. 운동은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깨우치고 가르쳐서 개인의 이익과는 상관없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행동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그래서 운동의 기반은 대중화 혹은 일반화에 있으며 그 동력은 ‘비 사무실화’ ‘비 직원화’에서 발생된다.

밀알 사역이 운동이 되는 이유를 두 가지 차원에서 설명할 수 있다. 우선 밀알의 모든 목표와 비전은 그 성격상 사무실 안에서 직원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취지와 목적을 알려 거기에 동조하는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함께 힘을 합해 이뤄가야 하는 일이다. 그들이 곧 기도단원, 협력단원, 실행단원들로 표현된다. 그들은 많을수록 좋은, 밀알의 동력이자 자원이다. 그들을 훈련 교육시켜 여러 형태의 사역에 나서게 함으로써 밀알의 목표가 달성될 수 있다.

최소한의 사무 공간과 유급 직원은 그들을 통솔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밀알의 성패는 단원들을 확보해 효과적으로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는 밀알의 외연이 확대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밀알의 정신과 가치가 확산돼 장애인을 위한 사회적 환경이 조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한 가지는 밀알이 아무리 많은 단원을 확보해도 밀알이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돼 있다는 점이다. 장애인 선교는 물론 장애인과 관련된 많은 문제가 한두 단체의 봉사나 자선 활동으로 해결될 수 없다. 결국 주류사회가 나서야 될 일이다. 주류사회의 인식과 자세가 바뀌어야 하고 그들이 앞장서야 가능한 일이다. 관건은 어떻게 주류 사회가 나서도록 할 것인가이다. 밀알은 바로 그 일을 하려는 것이다. 아직 침묵하고 망설이고 있는 주류사회를 일깨워 장애인을 위해 일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설정한 목표가 바로 계몽이다. 교회나 일반사회, 혹은 정부로 하여금 장애인을 위해 나서도록 다양한 방법을 통해 역할을 하려는 것이 밀알의 사명이다.

여기서 밀알 단원의 특성에 대해 이해해야 할 부분이 있다. 밀알에 한번 참여한 단원이 평생 밀알에서 일하기는 어렵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있을 수 있는 여러 형태의 이유로 인해 그렇게 한다는 건 실제로 불가능에 가깝다. 끊임없이 새로운 단원이 들어오고 나가고 하면서 밀알은 이어지고 발전해 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오히려 조직의 체질을 강화한다. 단체가 건강함을 증거한다. 그래서 밀알은 사람들에게 취지를 계속 알려 단원을 확보해야 한다.

‘한번 밀알은 영원한 밀알이다’라는 구호는 비록 밀알은 떠날지라도 밀알에서 배우고 공감한 장애인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어디를 가나 간직한다는 의미다. 밀알 단원으로 활동을 계속하든 하지 않든 밀알로 인해 장애인을 이해하게 돼 어디서 어떤 형태로든 장애인을 위해 역할을 한다면 그것 또한 밀알 사역의 결과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도 밀알 사역이 운동인 이유가 된다.

이재서 박사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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