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주선애 (24) 은퇴 후 어려운 교회 도우려 나이 육십에 운전면허

시골 마을 조그만 교회 재정 없어 사경회·교사강습 대부분 못 받아… 오랜 꿈 실행하려 용기 내 운전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가 1984년 8월 한국교회 선교100주년기념 교육대회에서 강의하고 있다.

때때로 대학원장 회의에 참가해 보면 대학원장들은 기사가 운전하는 비싼 차를 타고 왔다. 나는 대중교통을 타거나 이따금 택시를 이용했다. 비싼 차를 타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게도 운전 기술이 필요해보였다. 그래서 결심했다. 나이 60에 처음 운전을 배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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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운전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건 오래됐다. 40대부터 은퇴 후에 대한 꿈이 있었다. 기차를 타고 여행할 때 창밖으로 시골 마을의 조그만 교회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작은 교회들은 재정이 없어서 사경회도 못 하고 교사 강습도 받아볼 수 없는 곳이 대부분일 것이다. 은퇴 후 에는 이런 교회를 도와야겠다.’ 1960년대 보릿고개를 넘어야 하는 시절의 계획이었다.

이제 60세가 됐으니 용기를 내야지 하고 학교 근처에 있는 운전학원에 등록하고 두 달 치 학원비를 냈다. 두 달 치를 낸 것은 시간이 충분히 없을 뿐 아니라 노인의 모든 학습은 젊은이보다 몇 배나 느리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전면허 시험공부를 위해 시간을 쓰기가 너무 아까워서 꼭 학교 출퇴근 버스 안에서만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실기시험에 한 번 떨어지고 무난히 면허증을 딸 수 있었다. 가족들은 나의 운전을 극구 말렸다. 오랫동안 운전한 사람도 나이 60이 되면 그만둘 때인데 왜 위험한 운전을 하려느냐고 했다.

나는 몰래 중고차를 사서 학교에 놓아두고 학교 기사에게 동승운행을 부탁했다. 그러면서 학교 주변을 가끔 운전하며 익혔다. 그러다 집에까지 몰고 가서 식구들과 타협을 했다.

내가 운전을 하고 다니는 것을 보고 많은 중년들이 망설이다 용기를 얻었다며 좋아한다. 그래도 83세까지 23년 동안 노인인 어머니의 기사 역할뿐 아니라 그 많은 회의 참석에 이용할 수 있어서 늦게나마 배운 것을 감사히 생각한다. 운전하면서 더 많은 기도와 찬송을 할 수 있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출퇴근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1960~70년대 우리나라엔 한창 새마을운동이 일어났다. ‘박정희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는 데모 행렬이 거리를 누볐고 곳곳마다 길이 막히고 최루탄에 휩싸였다. 시골에선 초가집을 헐고 수도를 새롭게 만들며 길을 닦고 농사법을 바꾸는 저녁 모임들이 한창이었다.

박 대통령은 민족적 민주주의를 주장하며 국민들에게 꿈을 심어 주기에 열심이었다. 고속도로를 내고 나면 마이카 시대가 온다고 했고 통일벼를 심어 쌀이 남아돌 것이라고 했다. 믿거나 말거나 박 대통령이 밀고 나가고 있었다. 나도 장기간 집권하기 위한 홍보일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나라가 새로워지고 국민들의 안색이 밝아지는 것 같아 소망이 생겼다.

어느 날 새마을운동본부에서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바쁘다고 핑계를 댈까’하면서도 어떻든 나랏일이니 한번 나가보기로 했다. 새마을운동을 지도하는 여성들만 몇백 명이 모여 있었다. 나는 개화기 우리나라 여성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근대화를 이끌었던 선배들, 애국부인들, 그들의 학문에 대한 열기, 무지한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 일으킨 YWCA운동, 자녀교육에 대한 이야기 등 하고 싶었던 여성 관련 강연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신자든 아니든 우리나라 여성들을 상대로 사회교육을 할 수 있다는 데 사명감을 갖고 강연했다. 한 번은 새마을운동본부에서 내가 강의한다는 소식을 들은 어느 교수님이 “이런 일을 해도 되는 겁니까”라고 따지듯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나는 어느 당의 정치 강연을 하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 여성교육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몇 년을 ‘새마을 여성 강연자’로 살았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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