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침묵이 계속되고 있다. 일본의 한국 반도체 소재 등에 대한 수출규제 조치로 양국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데 공동 이웃인 미 행정부가 목소리 내기를 자제하고 있다. 미국 외교정책은 전통적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사안의 파급력이나 갈등양상의 심각성을 고려하면 선량한 중재자의 역할에 나서는 게 옳다.

미국은 한·일 갈등이 한·미·일 삼각 동맹 체제를 위협할 수준으로 치달을 경우 다양한 경로와 방식으로 중재에 나선 게 사실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갈등의 골이 깊어지던 2014년 4월 방한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 위안부들에게 행해진 것을 보면 엄청나게 악하고 나쁜 인권침해”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그러면서도 “한국과 일본 국민의 이해를 보면 과거보다는 미래를 봐야 한다”고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2012년 9월 독도 영유권 등으로 대치하던 한·일 양국을 향해 “지역의 안정과 평화에 대해 의심과 불확실성을 제기하는 행위는 아시아는 물론 미국이나 다른 어느 나라의 이익과도 부합하지 않는다”며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방치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최근의 한·일 갈등은 과거와 양상이 다르다. 과거사 문제나 외교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무역갈등, 경제전쟁으로 비화되고 있다. 과거사를 둘러싼 갈등 때문에 무역보복을 가하는 것은 국제 통상의 규범에 반하는 행위다. 시장경제와 자유무역을 기본가치로 받아들이는 국가라면 용인할 수 없는 행태다. 미국이 ‘이웃집 불구경하듯’ 방치할 수 없는 이유다. 이뿐만 아니다. 일본의 수출 제재는 비단 한국의 수출품뿐 아니라 미국 첨단기업에도 영향을 미친다. 첨단제품을 생산하는 분업 체제는 전 세계적으로 촘촘히 얽혀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 외교는 미국 이익 우선주의를 특징으로 한다. 든든한 한·미·일 삼각 공조는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고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기 위해 삼각 동맹은 유력한 외교 수단이다. 양국에서 반일, 반한 정서가 강화되면 공조가 뿌리부터 흔들린다. 이에 침묵하는 것은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

일본은 무역보복 조치를 취하기 전 미국과의 협의 과정을 거쳤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제는 한국의 입장을 들을 때다. 양국의 주장을 귀담아들은 뒤 미국이 국제 규범과 상식에 입각해 시시비비를 가리고 적절한 조치를 권하는 게 좋은 이웃으로서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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