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읍교회·영명학교 구심점으로 대규모 만세 함성 울리다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2부> 독립운동과 한국교회 (23·끝) 공주와 충남의 만세운동

공주 만세운동의 구심점은 당시 기독교의 중심이었던 공주읍교회와 영명학교였다. 영명고등학교 개교100주년기념탑 뒤 흉상.

지난 5일 충남 공주 영명학당길 근대문화탐방로. 영명중고등학교(구 영명학교) 후문부터 공주제일교회까지의 500m 거리는 시간을 100년 뒤로 되돌려놓은 듯했다. 영명고등학교 입구 한복판에는 개교 100주년 기념탑이 우뚝 솟아있었다. 탑 끝에는 십자가가 빛났다. 기념탑 뒤로는 이 학교 출신 운동가들의 흉상 3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왼쪽부터 영명학교 1회 졸업생 황인식 교장, 영명학교 2회 졸업생 조병옥 박사, 그리고 유관순 열사였다. 유 열사는 1914년 영명학교 중등과정을 2년간 다녔다. 충남 병천 출신인 그는 영명학교 교장이었던 미국 감리교 선교사, 엘리스 샤프(한국명 사애리시)의 눈에 띄어 2년간 학교를 다녔고 이후 서울 이화학당으로 전학을 갔다.

영명고 뒷편 근대문화탐방로에 설치된 ‘공주읍 만세일지’ 모자이크 그림.

근대문화탐방로는 영명중고교 뒷문에서 시작한다. 공주도서관 맞은편 길을 끼고 내려가자 골목길 담벼락에 무언가가 설치돼 있었다. ‘공주읍 만세운동 일지’라는 글자가 보였다. 글자 오른쪽으로는 모자이크로 제작된 10m 길이의 만세운동 그림이 펼쳐져 있었다. 태극기를 든 남녀 학생들이 만세를 외치고 수많은 군중이 뒤를 따르는 그림이었다.

왼쪽으로는 1919년 2월 15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공주읍교회(현 공주제일교회) 신홍식 목사가 김필수를 공주에 파견해 당시 공주읍교회 담임이었던 현석칠 목사와 안창호 목사, 교회 직원, 영명학교 교사들에게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만세운동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공주도 만세시위를 전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액자글이 전시돼 있었다. 이 액자는 공주 만세운동의 일지를 기록해놓은 것으로 총 15개가 설치돼 있다.

충남 지역 3·1운동은 1919년 3월 2일 부여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되며 시작됐다. 3일 대전 인동시장과 예산에서 본격적 시위가 일어났고 천안 병천(아우내), 공주의 장기·정안, 당진의 천의, 논산의 강경·연산, 홍성의 갈산·홍동·장곡, 연기 서천 서산 청양 아산 부여 보령 금산 등 충남 전역에서 4월 말까지 봉기가 이어졌다. 14개 군과 88개 읍면에서 총 339회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공주는 과거 감리교 선교 지역이었다. 1903년 설립된 공주읍교회와 영명학교가 만세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19년 4월 1일 공주읍교회 목회자와 영명학교 교직원, 학생, 졸업생 등이 주도해 만세 시위를 일으켰다. 당시 공주읍교회 담임은 현석칠 목사였다.

공주 만세운동의 최초 모임은 앞서 3월 24일 영명학교 교실에서 열렸다. 참석자는 현 목사를 비롯해 천안 예수교회 안창호 목사, 영명학교 교사 김관회, 현언동, 영명여학교 교사 이규상 등이었다. 이 모임에선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으니 공주에서도 속히 만세운동을 전개하자는 대화가 오갔다.

참석자들은 뜻을 함께한 뒤 각자 역할을 정했다. 현 목사는 전체적인 지휘를, 김관회는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반포해 영명학교와 공주 공립보통학교 남학생을, 현언동은 공주농업학교 학생을, 이규상은 영명여학교와 공주 공립보통학교 학생을 각각 담당해 학생들을 만세운동에 참여키로 결정했다. 주민을 만세운동에 참여시키는 일도 배분했다. 거사시각은 4월 1일 오후 2시 공주시장의 개시 때로 잡았다.

이들은 독립선언서 1000매를 학교 등사판을 이용해 인쇄해 태극기와 함께 시장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만세를 외쳤다. 영명학교 학생들은 시장통을 다니며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오후 6시까지 활보했다.

만세운동 관련자들은 대부분 잡혀갔다. 현 목사와 안 목사도 체포됐다.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은 인력거를 타고 태극기를 흔들며 선언서를 나눠주다 칼에 맞아 부상을 입은 채 체포됐다. 현 목사는 5월 경성에서 체포됐는데 그때까지 한성정부 수립 운동인 ‘국민대회’ 활동에 가담했다. 국민대회는 만세운동 이후 체계적으로 전국적 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협력체였다. 국민대회에서는 임시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4월 19일 밤 서울 통의동 김병수 집에 모여 임시정부 수립 건을 의논했고 당시 현 목사가 600원을 내기로 하는 등 국민대회에 필요한 인쇄물 마련 비용을 갹출했다. 현 목사는 3·1운동 시기 공주읍 만세운동과 한성 임시정부수립운동에 모두 참했다.

공주제일교회 기독교박물관과 신홍식 목사 동상.

현재 공주제일교회 예배당 바로 옆에는 구 예배당을 리모델링한 공주기독교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붉은 벽돌 건물의 박물관은 등록문화재 472호다. 박물관 입구엔 신홍식 목사의 동상이 서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교회의 역사를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과 모형물이 전시돼 있다.

그중 낡고 헤어진 성경 한 권이 눈에 띈다. 공주제일교회에서 사역했던 김수철 목사가 읽던 성경이다. 김 목사는 만세운동 당시 영명학교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해 배포한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공주제일교회를 거쳐 서울 배재중고교 교목을 지냈다. 그의 성경은 가죽표지를 세 번이나 갈았을 정도로 많이 읽은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박물관 관계자는 “공주제일교회는 영명학교와 함께 만세운동 당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곳”이라며 “만세운동의 정신이 오늘에도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공주=글·사진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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