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가정, 성도는 가족” 직분자들 낮은 자의 마음으로 섬겨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의 전도, 너무 쉽습니다 <10>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가 2017년 3월 교회에서 열린 새신자반 졸업식에서 수료생을 인터뷰하고 있다.세계로교회 제공

교회는 처음부터 한 가정이며, 성도는 한 가족이다. 예수님께서는 왜 교회를 일컬어 가족이라고 하셨는가. 본질적으로 예수님의 피로 맺어졌기 때문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부산 세계로교회는 어린이집 차량을 운전하는 분과 교역자 외에는 유급직원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교회의 그 많은 일은 누가 했을까. 장로님들이 모두 맡아서 했다.

새벽기도 차량운행도 장로님이 했고 교구를 맡아 구역장을 섬기는 것도 장로님이 했다. 특히 노인구역을 전문적으로 섬기며 차도 제대로 못 타는 어르신들을 온천에 모셔가서 자기 돈으로 목욕을 시켜드리고 맛난 음식도 대접했다.

세계로교회는 새신자들이 워낙 많다 보니 나온 지 1년이 되지 않아도 회심의 경험이 확실하고 열심과 책임감이 있으면 구역장으로 세운다. 그래서 예수 믿고 은혜받아 구역장이 되기는 했지만, 성경이나 교회 전반의 일들은 잘 모르는 구역장이 많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해주는 분들이 역시 장로님이다. 혹시 그런 구역장이 세워지면 장로님들이 그 구역의 구역원으로 들어가 구역장이 하라는 대로 순종하며 따라준다. 간혹 잘못하는 것들이 보이면 잘 할 수 있도록 옆에서 격려해준다. “대단하십니다.” “너무 잘하십니다.” “장로인 제가 따라갈 수 없겠네요.” 그렇게 계속 격려해주니 신앙 생활한 지 1년만 되면 다른 교회 안수집사보다 일을 더 잘한다.

명절이 되면 장로님들은 교구 성도들에게 양말을 돌리고 어르신들에게는 돼지고기라도 한 근 사서 선물한다. 장로님들이 이렇게 섬길 수 있는 원동력은 교회는 한 가족이라는 마인드가 있기 때문이다.

세상 권력은 높이 올라갈수록 다스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과 완전히 거꾸로다. 목사는 장로님을 섬기고, 장로님은 성도들을 섬겨야 한다. 세상 권력이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은 삼각형 구조라면, 교회는 목사와 장로들이 아래로 내려오고 성도들은 위로 올라가는 역삼각형 구조가 돼야 한다.

따라서 우리교회는 장로나 안수집사 직분을 세울 때 직분을 받는 분들이 돈을 내서 뭔가 하는 게 없다. 일단 장로, 집사가 되면 ‘완전히 죽었다’는 생각으로 일한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시키는 것은 무조건 해야 하는, 종 가운데 종으로 세워진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도 예산이 허락하는 한 마음껏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직분자들은 교회에 일이 생기면 24시간 가리지 않고 달려온다. 새벽 2시에 전화를 해도 5분 안에 달려와 일을 처리하고 전화로 결과를 알려준다. 이처럼 교회에서 직분을 받았다는 것은 교회가 필요로 하면 뭐든지 다 하겠다는 헌신의 다짐이다. ‘나는 성도들의 발을 씻어주는 종’이라는 생각으로 뛰는 것이다.

집안에서 부모는 자녀들을 철저하게 섬긴다. 열심히 돈 벌어서 등록금을 대주고 밥도 해주고 옷도 사준다. 때로 자녀들이 투정을 부려도 잘 타이른다.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있는 부모는 공감할 내용이다. 아이가 아침 7시에 깨워달라고 하면 아무리 깨워도 늦장을 부리는 경우가 있다. 도저히 못 일어나니까 안쓰러운 마음에 조금이라도 더 자라고 30분 뒤에 다시 깨운다. 그러면 30분 늦게 일어났다고 성질을 부린다. “엄마, 왜 지금 깨워요!” 자기 잘못은 오간 데 없고 다짜고짜 엄마 탓부터 한다. 자녀가 늦장을 부려서 허겁지겁 뛰어가는데도 엄마는 혹시나 배가 고프지는 않을까 걱정이 돼 뭐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애가 탄다. 이게 부모의 마음이다. 이게 섬기는 어른의 마음이다.

열심히 교회사역을 감당하시는 한 장로님이 계셨다. 건축일을 하다가 그만 어려움을 당하게 됐다. 다행히 장로님의 부인이 음식을 참 잘했다. 어느 분이 황토로 지은 집을 무료로 빌려주고 6개월 후부터 이익이 나면 약간의 돈만 달라고 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가게 자리는 얻었는데 음식점을 열 자본이 없었다. 간판 하나 달 돈도 없었다.

장로님은 혹시 구역 식구들에게 누라도 끼칠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구역원들이 자기 일처럼 장로님을 돕기 시작했다. 몇몇 성도는 간판을 달아주고, 어떤 사람은 식당 집기를 사줬다. 어떤 사람은 조리대를 설치해줬다. 이런 성도들을 보면서 장로님이 감격해 눈물을 글썽였다. “손 목사님, 제가 이렇게 교인들의 사랑을 받아서 어떻게 합니까.”

평소에 장로님이 교인들을 철저하게 섬겼기에 이제는 교인들이 장로님을 떠받드는 것이다. 이처럼 장로님과 성도들은 마치 한 가족의 형님, 오빠와 같아야 한다.

우리교회는 장로석을 따로 두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 교회에 온 사람들은 6개월이 지나도 누가 장로인지조차 모른다. 장로들은 예배 전 밖에 서 있다가 성도가 오면 뛰어가 반긴다. 그래서 교회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은 장로이고 그다음은 구역장, 그다음은 집사다.

교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성도들의 삶에 급속도로 변화가 일어난다. 예수님을 믿은 자들이 감동을 하면 믿음은 급성장한다. 믿은 지 3~6개월이 되면 믿음이 급속도로 자란다. 이때 초신자의 믿음이 꺾이지 않고 계속 성장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는 게 교회의 사명이고 직분자가 할 일이다.

교회에서 섬기지 않으면 직분자가 아니다. 직분자들은 절대로 사람을 비난하거나 비판해선 안 된다. ‘굴러온 돌이 어디 박힌 돌을….’ 이런 텃세는 부리지도,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교회는 시장터가 아니다.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

전도를 위한 대화 이렇게…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을 믿는 것

전도자: 붓다는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 외에는 어떠한 판단도 내릴 수 없다는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붓다는 중생의 현실 문제와 동떨어진 사변철학을 멀리했습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사변적인 문제는 “명분에도 맞지 않고 도리에도 맞지 않고 수행의 근본도 맞지 않고 지혜로 향하지도 않고 깨달음의 길도 아니며 열반으로 인도하지도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불교는 인간의 아들로 태어나 존재의 실상을 깨달아 생사의 불안과 공포로부터 자유를 얻으려 했던 붓다의 가르침을 믿는 것이지 어떤 신이나 절대자를 떠받들지 않습니다. 붓다는 자신을 신격화하거나 절대화하는 것을 극구 반대했던 인물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당시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불교를 원시불교 근본불교 초기불교라 부릅니다. 이게 정통불교입니다. 정통불교는 붓다의 성도(成道)로부터 입멸 후 30년까지의 불교를 말합니다. 경전으로는 ‘팔리삼장’과 ‘아함경’이 있습니다. 이는 구전되다가 1세기 중반에 문서화된 것입니다.

붓다의 사상을 개인주의적으로 해석하느냐, 사회적 차원에서 해석하느냐에 따라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로 나뉩니다. 붓다의 가르침이 전개되는 지역에 따라 남방불교 북방불교로 구분해 불렸고, 전개되는 국가에 따라 인도불교 중국불교 일본불교 한국불교 티벳불교로도 불립니다. 붓다가 깨달았던 경지를 이생에서 체득하려고 하는가, 지금보다 좋은 세상에 태어난 다음 생에서 성취하려는가에 따라 선불교와 정토불교로 나뉘게 됩니다.

대상자1: 불교에 인격신 개념이 없다는 사실은 처음 듣습니다. 결국 불교는 인간학이자 휴머니즘을 중시하는군요. 그래도 불교에는 경전이 있지 않습니까.

전도자: BC 486년 붓다가 세상을 떠나자 스승의 장례를 치른 비구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붓다의 가르침을 훼손하지 않고 잘 보존하기 위해 경전을 모으는 일이었습니다. 500명의 고승이 모여 만든 것이라 해서 오백결집이라 합니다. 이게 노래와 암송으로 구전되다가 최초로 문서화된 것이 BC 35년부터 AD 32년 사이라고 합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450년이나 구전된 후 경전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붓다가 죽은 지 100년이 지난 뒤인 BC 386년, 최초로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 차이로 비구니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납니다. 이 분열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불교가 원시불교 초기불교 근본불교로 불리는 정통불교입니다. 정통불교는 붓다의 말씀을 대체로 그대로 전하고 있는데 붓다는 현실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주력했습니다.

붓다가 말한 것은 현실 세계입니다. 그 외에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영혼이나 윤회 등은 “단지 말로 설명이 있을 뿐이요. 물어도 알 수 없고 의혹만 증폭시키는 것이니 현실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붓다 다르마’라는 불교 전문서적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선이니 악이니 정의니 양심이니 신이니 영혼이니 하는 것들은 그런 것을 필요로 하거나 그것을 말해야 할 처지에 따라 말하는 것일 뿐 선악의 실체도 없고 정의나 양심의 실체도 없으며 신이나 영혼 같은 것은 구체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체가 없는데도 실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망상입니다. 불교인들이 기적을 운운하는 것이야말로 불교적이지 못한 무지의 소치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불교의 사고로 말하는 세상에는 기적과 같은 현상이 있을 뿐이지 기적은 없습니다.”

붓다는 힌두교의 윤회설에 대해 “알 수도 없고 증명되지도 않은 것이니 망상이며 카스트 제도만 공고화시킨다”면서 “인간이 만든 제도 중 가장 사악한 제도가 카스트제도와 윤회설”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붓다 다르마’라는 책에 나왔듯 오늘날 붓다가 말할 수 없다고 침묵했던 문제를 말하고 붓다가 유보했던 문제들에 대해 어떤 확정적 단언을 내린다면 그것은 불교일 수 없습니다. 붓다가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침묵했는데 그 문제를 말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사상은 될 수 있어도 불교는 아닙니다.(계속)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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