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집에 자녀가 많아도 그런데 나라가 소란한 것이야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니라 화해할 줄 모르는 것이고, 갈등과 분쟁을 해결해서 연합과 일치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토록 나뉘어 싸우고 서로 깊은 상처를 안겨주며 원수처럼 변해갈까요? 누군가 밤낮없이 회의를 한 결과입니다. 그들의 지혜로운 결정입니다. “나누어서 다스리자.”

분할통치는 고전적인 전략이고 널리 알려진 정치 기술입니다. 식민제국주의 시대에는 가장 효율적인 통치 수단이었습니다. 이편 저편 끌어들여 내 편을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훨씬 더 저비용에 고효율의 결실을 얻는 기법이 디바이드 앤드 룰(Divide and Rule)입니다. 적을 나누어 약화시켜서 힘을 결집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내 힘을 키우고 세력을 연합하는 시간을 버는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나누어서 다스리자’는 책략에 걸려들면 ‘나뉘어 무너지는’ 파멸과 패망에 접어듭니다. 알고도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대체 누가 분할통치를 획책합니까? 성경만이 그 실체를 알려줍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과 인간을 나누는 데 성공합니다. 인간더러 하나님처럼 되라고 유혹합니다. 하나님처럼 되었더니 부부 사이에 갈등이 생겨납니다. 남편이 아내를 탓하고 아내는 유혹한 존재를 비난합니다. 인간의 끝없는 분열의 시작입니다. 지배와 복종이라는 권력관계를 만들어 하나 되려 해보지만 외관에 불과합니다. 한쪽은 늘 배신을 꿈꾸고, 다른 한쪽은 배신의 싹을 자르고 뿌리 뽑느라 힘을 다합니다. 그 불안만큼 다들 불행합니다.

권력관계는 죄인들의 전형적인 삶의 실체입니다. 하나님과 나누어진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삶의 현실입니다. 이 현실 속으로 예수님이 뛰어드셨습니다. 기존의 권력질서를 송두리째 갈아엎으십니다. 그 점에서 예수님은 혁명가입니다. 그러나 모든 권력관계를 사랑의 관계로 치환하심으로 도리어 반혁명가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분은 누가 이 세상의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지 알려주십니다. 그분은 그 악한 존재가 어떻게 세상을 나누어서 다스리는지 비밀스러운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적을 나누려면 스스로는 나뉘지 말아야 하는 원칙입니다.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막 3:24∼26)

악한 세력은 자신의 대적 앞에 실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적을 나누기 위해서는 시기, 질투, 분노, 비난과 같은 독초를 사방에 퍼뜨리고 사상, 이념, 문화, 언론을 무기 삼아 전방위로 공격합니다. 아내와 남편이 불화하게 하고 형제자매가 다투게 하고 사장과 사원이 서로 물어뜯게 하고 나라 안의 세력들이 사분오열해서 자멸의 길로 치닫게 합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하나 되는 교회는 항상 그들의 주적입니다. 예수님은 이 싸움에서 이기는 전략을 가르쳐주시고 우리 모두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십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장식으로 목에 걸고 건물에 매달기만 했지 날마다 그 십자가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 따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악의 축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래 버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그는 허리가 부러졌고 마지막 발악만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대적들이 십자가를 지지 않고 사방에 걸어놓고 자기들끼리 싸우는 덕분에 자주 파티를 벌이며 승리의 개선가를 부릅니다. 그들의 변함없는 전략이 여전히 위력을 떨치고 있습니다. “나누어서 다스리자.” 그들은 대적이 나뉘어 싸우다 자멸하는 것에 쾌재를 부릅니다. 예수님은 때문에 날마다 기도하십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같이 저들도 하나가 되게 하소서.”

조정민 베이직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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