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주선애 (28) ‘분뇨 못’ 뚝방촌 아이들… 사랑과 인내는 변화 가져와

벌금 무서워 화장실 못짓는 판자촌… 기독교교육과 학생 4명이 숙식하며 화장실 짓고 야간 중학교도 만들어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둘째 줄 왼쪽 네 번째)가 1975년 제1회 망원중학교 졸업식에서 이상양(둘째 줄 왼쪽 세 번째) 전도사, 학생, 교사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1970년대 우리나라는 급작스러운 산업화 과정에 들어서면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확산됐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은 새로 개발되는 지역이었는데 무척 남루한 차림의 초등학생들이 줄지어 다녔다. 하루는 아이들이 사는 곳이 궁금해 뒤따라가 봤다. 한강 쪽으로 몇 분쯤 걸어가자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수천 세대의 판자촌이 둑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둑 너머에는 강 쪽으로 다시 둑을 쌓고 거기에 서울 시내 분뇨를 모두 쏟아부은 ‘분뇨 못’이 형성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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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무허가 판자촌은 공중에서 사진을 찍어 보고 새집이 생기거나 확장될 경우 벌금을 물리기 때문에 화장실이 없다고 했다. 막대기를 세우고 모래를 채운 가마니로 막아놓은 화장실은 몇 곳 있었지만, 도저히 그 많은 인구를 수용할 수가 없었다. 결국 사람들은 인근 밭에서 용변을 봐야 했고 파리가 새까맣게 온 마을을 덮었다. 나는 마음이 슬퍼서 지금의 성산대교 근방 둑에 서서 울었다.

다음 날 나는 학부 기독교교육과 3학년 강의실에서 망원동 뚝방촌 사람들의 참혹한 삶을 본 대로 전했다. 강의 후 서너 명의 학생이 따라 나오면서 “저희가 한 번 가볼 수 없겠습니까” 하며 위치를 물었다. 학생들은 그날로 동네를 찾아갔고, 학생들도 눈시울을 적셨다고 했다. 학생들은 이후 하루에 100원짜리 방을 얻었다. 그 동네 한복판에 있는 비닐 창문의 한 칸짜리 온돌방이었다.

이상양 정태일 기현두 고애신 4명 학생은 그 방에서 같이 먹고 자며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동네에 환자가 생기면 업어서 병원에 가기도 했다. 이들이 제일 먼저 한 것은 화장실을 짓는 일이었다. 관청에서 못 짓게 할 것을 알고 밤마다 전깃불을 켜놓고 조금씩 지었다. 땅을 길게 파고 시멘트로 화장실을 지었다. 다음은 더러운 개울 위로 다리를 놓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밤마다 몰래 노동을 했고 왕복 3시간이 넘게 걸리는 학교까지 다녔다.

그 팀의 단장인 이상양은 폐결핵 환자였다. 성품이 부드럽고 사람들을 기쁨으로 섬겨 동네에서는 ‘천사 전도사’란 이름으로 불렸다. 이 전도사에게 등록금을 하라고 돈을 주면 금방 뚝방촌 사람들을 돕는 데 다 써 버렸다. 학교에 갈 버스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분뇨 처리장에 드나드는 성동구의 분뇨차 기사에게 부드럽게 찾아가 대화하고 전도하며 사귀었다. 차량은 주로 한강 둑 위로 다니기 때문에 광나루까지 동선이 이어졌고 기사는 이 전도사를 차량으로 태워다 주곤 했다.

한 번은 내게 “교수님, 버스 차장들(시내버스에서 문을 여닫으며 손님을 태우고 내리던 사람)이 하루에 몇 번이나 문을 여닫는지 아세요?”라고 물었다. 내가 알 리 없었다. “1400여번이래요.” 이 전도사는 늘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우리는 공부를 중단한 아이들을 위해 18㎡(약 9평)짜리 공간에 세를 얻어 장로회신학대에서 낡은 의자를 가져와 야간 중학교를 만들었다. 첫날 수업을 시작하기 전 먼저 기도하자고 했더니 기도시간에 분필이 날아오는 등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 전도사가 없는 돈으로 밥을 지어놓고 심방을 가면 아이들이 와서 먼저 다 먹어 버리곤 했다.

하지만 교육은 아이들을 변화시켰다. 2~3년 후엔 공장에 나가는 아이들이 공부하기 전 자기들이 반찬을 사서 저녁을 지어놓고 이 전도사를 위해 저녁상을 차렸다. 사랑과 인내는 변화를 가져온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달았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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